철학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박이문 <현상학과 분석철학> 리뷰

by 최크롬

1.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된 서양 철학의 유구한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현상학과 분석철학이라고 불리는 두 개의 큰 줄기를 만나게 된다. 이 철학 사조들은 철학적 앎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과학과 대치되는 철학의 역할을 명확히 규정하고, 철학만의 고유한 차원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상학과 분석철학은 철학 자체에 대한 이론이기도 하다. 이 둘은 실존주의와 언어철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현상학과 분석철학이 방법론을 가리키는 구분이라면 위 둘은 추구하는 대상을 기준으로 한 구별이다. <현상학과 분석철학>은 이처럼 현상학과 분석철학,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20세기 전반의 철학사를 돌아보는 박이문(필명) 교수의 에세이이다.





2. 현상학은 어떤 학문인가? '현상'은 무엇인가? 거칠게 표현하면 현상은 의식의 물질 혹은 비물질적인 대상이 의식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원초적인 경험이다. 이는 칸트가 가리키는, 어떤 존재가 외부에 나타나는 현상과는 다르다. 현상은 의식 내부에서 나타나는 무엇이다. 현상학자 후설은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절대적인 앎을 찾고자 했다. 의식 내부의 초험적 자아는 에이도스(eidos)라는 절대적 대상을 인식한다. 가령 수학에서 지식의 절대성의 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절대적 지식은 구체적인 물리적 현상을 넘어 별개의 차원에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의식, 즉 순수의식은 개인의 심리적인 인식 밖에 존재한다. 따라서 현상학은 물리적 존재를 논하는 과학과 구별된다. 현상학이 추구하는 지식은 이데아에 가깝다(ex. 어렸을 때부터 찍어온 나의 사진들로부터 그 모두가 나임을 지각케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한편 현상학을 방법론으로 삼는 실존주의는 인간에 관한 이론이다. 실존은 자율적이고 체험하는 인간이다. 현상학은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갖게 되는 체험을 기술하는 이론이므로 실존주의와 필연적 관계를 맺게 된다.





3. 현상학의 시조 격인 후설은 경험으로부터 명증한 앎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 의식이 의식 대상과 다른 차원에 있으며 필연적으로 무엇인가를 능동적으로 지향한다는, 의식의 지향성을 주장했다. 의식은 다양한 경험을 종합해서 절대적 지식을 만들어낸다. 이에 대한 조건이 바로 초험적 자아의 존재이다. 하지만 의미대상이 객관적으로 의식에 주어진다는 것과 의식의 지향성은 객관과 주관을 모두 아우르며 모순을 내포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리고 초험적 자아는 경험이 아닌 논리적으로 추리해낸 존재이므로, 현상학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존재학에 초점을 맞춘다. 인식 차원에서 존재 일반은 인간을 통해서 발현된다. 인간은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모든 사고와 앎도 인간의 원초적 경험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인간은 '다자인(Dasein)', 즉 세계 내의 존재이다. 그리고 '기존조건성'이란 개념은 내가 자유로움에도 항상 어떤 조건에 제한되었다는 의미이다. 하이데거는 자유를 의식하는, 존재학적인 태도가 진정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4. 사르트르는 의식으로서의 존재와 대상으로서의 존재를 나누어 생각했다. 전자를 즉자, 그냥 있는 것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대자,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즉자는 인간이 아닌 모든 사물을 가리키고 대자는 인간을 가리킨다. 인간의 특징은 주체성이다. 인과법칙에 지배되지 않는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조건성은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자유를 가능케 하는 필요조건이다. 한편은 인간은 즉자가 되려고 하면서도 대자로 남으려는, 모순된 욕망을 지니고 있다. 대자는 결핍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핍이 충족되면 대자는 의식 없는 존재인 즉자가 된다. 타인은 위협이다. 타인은 나를 즉자로서 소유하고자 한다. 타인 앞에서 옷을 입는 이유는 우리가 타인의 시선으로 인해 즉자로 전락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관계는 언제나 적대적, 소유의 관계로만 남는 운명을 지닌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에 초점을 두었다. 그는 언어가 개념적 의미 외의 언어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가령 '어머니'와 'mother'는 개념상으로 같아도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따라서 언어는 대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전달할 때 참다운 서술적 언어가 된다. 그는 정신과 물질이 존재의 뗄 수 없는 양면을 나타내기 위한 개념이라고 말한다. 둘 다 존재라는 대상을 정확히 나타낼 수 없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가장 존재에 가까운 언어는 예술이다. 예술은 비개념적이고 덜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은 언어라기보다 주관적 태도에 가깝고, 진리 개념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언어와 사물 사이의 관계이며, 언어가 기능할 수 있는 이유는 서술대상과 같지 않고 오히려 다르기 때문이라는 한계가 있다.





5. 분석철학에 의하면 철학적 문제란 사물, 사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의미를 혼동해서 생기는 개념적 문제이다. 가령 "강아지는 귀가 크다"에서의 '크다'라는 서술적 기능과 "강아지는 귀엽다"에서의 '귀엽다'라는 비서술적 기능이 문법 형태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한다. 분석철학의 기반을 닦은 논리실증주의에서는 진리를 필연적 진리와 우연적 진리로 나눈다. 전자는 관념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구체적인 사물에 관한 것이다. "총각은 장가가지 않은 남자다"는 관념에 관한 진리이다.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언어의 의미는 그 언어의 실증방법이라고 말한다. "강아지는 귀가 크다"의 의미는 귀의 크기를 측정할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반면 '귀엽다'는 측정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윤리학, 미학, 형이상학을 깡그리 무시하는 논리실증주의자들에 대립해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일상언어철학이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언어의 의미는 실증방법이 아니라 언어의 용법에 불과하다. 한편 후기 논리실증주의자인 칼 포퍼는 의미 있는 진술의 조건이 실증가능성이 아니라 반증가능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분석철학은 언어를 분석, 그에 대해 서술함으로써 존재를 설명하고자 한다. 존재는 의미로 환원된다.





6. 무어가 분석철학자로 불리는 이유는 그의 철학하는 방법론 때문이다. 그는 버클리의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관념론의 존재를 비판함으로써, 관념론의 타당성에 흠집을 내고자 했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종종 상식과 반대되는 주장을 한다. 무어는 그들이 논리적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철학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보다 이미 발견한 것들을 투명하게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러셀은 기호논리학과 더불어 서술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가령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다"라는 명제는 프랑스의 왕이 정말로 존재하고 대머리라는 뜻이 아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프랑스의 왕이 된다면 그는 반드시 대머리다"라는 뜻이다. 보통명사는 서술구로 전환된다. 러셀은 논리원자주의를 제창했다. 모든 사물은 사실로 환원되며, 가장 최소한의 사실은 원자적 사실이다. 원자적 사실들이 모인 결합체는 각 명제들의 참거짓에 의존하는 진위 함수가 된다. 즉 원자적 사실을 분석하면 어떤 명제라도 진위를 가려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가 원자적 사실로 구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원자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다른 형태의 지식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원자적 사실은 다른 문화권에서는 원자적 사실이 아닐 수가 있다. 우리가 눈이라고 부르는 것은 에스키모인들은 여러 개의 존재들로 나누어 부르기 때문이다.





7. 또다른 논리실증주의자인 카르납은 철학의 기능이 '이상언어'를 제시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철학의 문제는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느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그에 의하면 철학에서 신, 수, 의미 등의 단어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들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철학적 논쟁은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건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어떤 언어가 가장 적절한가에 대한 의견차일 뿐이다. 그는 이런 과정에서 어떤 언어가 진리에 가까운지는 결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단지 편리함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현실에서는 물리학의 언어가 가장 객관성을 가진다. 하지만 이상언어의 계획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의해서 깨지게 된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원자적 진술이 사실을 전달하고 지시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후기에 가서는 지시가 언어의 기능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용도에 중점을 준 의미론을 제창한다. 언어의 의미는 어떻게 쓰이는가를 안다는 것이다. 결국 언어의 사용은 인간의 생활양식이다. 따라서 논리실증주의자들과 반대로 형이상학자와 종교인의 언어도 그들에게는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용도의미론은 앎의 객관성을 제한하고 부정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8.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철학의 종말에 대해 언급한다. 과학의 발달로 철학의 영역이 좁아지고 철학의 과제가 모두 해결되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는 한계 속에서의 앎에 대한 승리를 인정하고 권태에 빠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과학적 태도를 뒤로하고 형이상학과 초월적 존재에 대한 연구로 확장하는 것이다. 현상학과 분석철학 이후로 새로운 사조가 또 등장할지는 나로선 잘 모르겠다. 어떤 학문이 완결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괴델 이후의 논리학이 문득 떠오른다. 하지만 인간의 사유가 지속되는 한, 모든 학문은 영원할 거라는 묘한 믿음을 저버리긴 어려운 것 같다. 아무리 먼 미래에 철학이 구시대의 유물, 따분한 오후의 디저트로 소비될 거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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