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리뷰
1. 사랑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감정인 동시에,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가치이다. 우리는 초중고 12년 동안 많은 것을 배우지만 정작 교과서에는 사랑에 대한 내용이 없다. 정치, 윤리, 논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철학자들조차도 이상하게 사랑에 대해서는 쓸만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에리히 프롬의 저서가 있지만 그닥 실용적이지 않다). 사실 여기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사랑은 국가와 공동체의 일이 아닌, 그저 '니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엄밀히 따지면 인간의 생존과 행정을 위한 매끄러운 규약과 거리가 멀다. 물론 "사랑도 하나의 약속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연인 관계의 일부분을 이루는 껍데기일 뿐이다. 어느 날 연인 중 한 사람의 사랑이 식었다면 그것은 계약 위반인가?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연인 간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 없다고. 그건 한 인간의 책임을 넘어선 일이라고.
2.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남자 주인공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한 관계의 시작부터 종말까지의 이야기이다. 우연한 만남으로 형성된 강렬한 감정은 근심 가득한 '썸' 단계를 지나 사귐이 되고, 콩깍지 씐 초기를 지나 잦은 다툼과 못 볼 꼴 넘쳐나는 시간을 거친다. 그렇게 성숙함과 삐걱거림을 오가던 관계는 빛이 바래며 결국 사소한 계기가 도화선이 되어 이별을 맞이한다. 하지만 헤어짐이 다들 그렇듯, 우울감 속에서 모든 방향의 비난을 일삼던 화자는 마법처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되고 이 픽션 아닌 픽션(?)의 여정은 끝이 난다. 이처럼 스토리적인 측면만 보면 책은 젊은 두 남녀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지극히 통상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3. 그럼에도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저자의 대표작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뻔하디 뻔한 사랑에 철학이라는 독특한 잣대로 분석을 가했기 때문이다. 가령 사랑에 빠진 사람의 자격지심을 논하는 한 대목을 보자.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믿어야만 한다면,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을 할 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묻게 된다. “그/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59p
알랭 드 보통은 막상 호감을 얻어냈을 때 겪게 되는 감정을 위처럼 설명한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누가 더 나은 사람인지를 따져보게 되는 건 자명하고, 겉으로는 똑같은 개인일지라도 주관적 관점에서는 서로의 매력이 비대칭적이기 때문이다. 한편 연인 간 사랑이 행동을 규약하는 고매한 가치가 되기에 부적합하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여러 철학자들의 도덕 개념을 이용한다.
우리는 공리주의자들처럼 사랑하며 시간을 보냈다. 침실에서 우리는 플라톤이나 칸트가 아니라 홉스와 벤담의 추종자였다. 우리는 초월적 가치가 아니라 선호에 기초에서 도덕적 판단을 했다. 224p
플라톤과 칸트를 꺼낸 이유는 사랑이 이데아의 모습으로 추앙받거나 의무의 모습으로 삶을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 서로의 선호, 즉 좋음에 따라 도덕적 판단을 한다는 홉스와 벤담의 실용적인 견해를 통해 위의 깨달음에 다다른 것이다. 다른 가치가 부동의 물질이라면, 사랑은 불가해한 요소 덩어리의 살아 있는 생물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의사가 되어 철학이란 메스를 가지고 때론 능숙하게, 때론 조심스럽게 사랑을 해부한다.
4. 그렇다면 질문. 이 빌어먹을 사랑을 대하는 좋은 자세는 무엇인가? 저자는 낭만적 실증주의와 금욕주의 사이에 있으라고 말한다. 전자는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노력 여하에 따라 필연적으로 고통 없는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마음을 가진 인간에게 어렵다. 반대로 후자는 지나치게 회의적이다. 사랑 끝에 마주하는 건 고통과 비합리성이다. 이런 태도의 인간은 관계에서 발생하는 상처를 피해 갈 수 있지만 우리의 감정의 요구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사랑은 중도에서 끊임없는 조율을 요하는 정치와도 비슷하다. 좋은 사랑이란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지리멸렬한 현실의 굴곡을 견뎌낼 수 있고, 인간 본능의 롤러코스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숭고하거나 무가치하지도 않지만, 역설적으로 지금 시대에 어울리는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