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차일디니 <초전 설득> 리뷰
1. 올해 초, 피부 프락셀(레이저) 시술을 받고 싶어서 피부과에 들렀다. 미용에 특별히 투자해본 적이 없는 나는 합리적인 가격에 대해 무지한 상태였고, 간단한 진료 후 서비스 담당 직원분 상대로 상담을 받게 되었다. 설명을 들어 보니 역시나 부담스러운 액수였다. 아예 받지 않거나 새로 더 알아보기도 애매하고... 머릿속으로 열심히 기회비용을 재고 있던 찰나, 직원분이 나의 신분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막학기 학생이고... 케이팝 기획 쪽을 진로로 잡고 있다 등등... 어느새 TMI까지 술술 불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결국 세부적인 이야기(무슨 그룹을 좋아하냐)까지 들먹거리던 나는 초점을 잃어버리고 쿨하게(?) 결제 사인을 해 버렸다. 이성의 화신이라고 자부하던 내가 영업당해버린 것이다.
2. 반추해보면 그분의 작전은 꽤 치밀했다. 먼저 다른 이야기로 주의를 분산시키고, 디테일한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신뢰를 얻어냈다. 나이대가 젊어서 그런지 말투에 센스가 묻어 나오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레이저 시술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영업이 생각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체감한 순간이었다. 로버트 차일디니의 <초전 설득>은 위와 같이 어떤 점에서 우리가 설득당하느냐에 대한 실용적 지침서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거의 모든 상호작용은 설득으로 환원 가능하고, 우리는 매번 설득당하거나 설득하는 순간에 놓인다. 문제는 우리가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잠시 끌려버린 어그로에서부터 의사결정을 한다는 사실에서 온다. 따라서 설득을 연구하려면 심리에 주목해야 한다.
3. 책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선택을 하기 직전의 주의에 크게 좌우된다. 책이 '오프너(opener)'라고 칭하는 개념은 여기서 비롯된다. 대화의 운을 어떻게 떼느냐에 따라서 일종의 프레임이 생성된다. 예컨대 긍정형으로 치우친 설문 조사의 질문들("이 브랜드가 만족스럽습니까?", "당신은 도전적인 사람입니까?")은 우리가 부정적 증거를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는 질문과 합치하는 정보 위주로 사고하는 인간의 확증 편향을 잘 보여준다. 또한 메시지의 중요성을 부각하기 위해 다른 주제와 정보보다 훨씬 많이 노출시키거나(언론의 경우) 배경 정보(인테리어나 웹 디자인의 경우)을 그에 맞게 꾸미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가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 제품이 맨 처음 어떤 형태로 전달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한편 섹슈얼 코드, 공포감 조성, 차별성 강조, '너'와 '당신' 사용, 미스테리함 부각시키기 등은 우리가 SNS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전략들이다.
4. 설득 전략을 잘 이용하면 나 스스로를 설득하는 장치도 구성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면, 더욱 효율적인 자기계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기계발은 게으른 나를 설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주변 공간을 성공과 발전에 대한 경구로 장식하고, if/then 형태의 보상 체계를 만드는 것도 결국 스스로를 설득하는 관계에 해당된다. 거꾸로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가령 수학 시험을 치르기 전 민족과 성별 기록 유무에 따라 점수가 달라진다고 한다. 첫 문단의 썰처럼 주의를 집중하지 못한다고 판단되면, 당장의 의사결정을 미룰 수 있다. 버스 내 영업이 강력한 이유는 덜컹거림과 낯선 사람들이 많은 환경이 신중함을 물리치는 것에서 기인한다.
5. 사실 <초전 설득>이 다양한 지침을 제공하는 만큼, 설득의 상황은 단순히 상업적, 자기계발적 관계로만 규정할 수 없다. 단순히 구두로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서부터, 카피를 써야 할 때도 있고, PT를 할 때도 있으며, 토론 상황에 놓일 때도 있다. 따라서 모든 설득에 호환되는 맥가이버 칼은 없기에, 이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으레 자기계발 서적이 그렇듯, 특히 이미 알려진 심리학적 사실들이 대부분인 <초전 설득>은 체화 여부에 따라 무가치한 책이 될 수 있다. 한 가지 유효했던 책의 팁이 있다면, 일부러 허술한 점을 내비치는 점이 경험적으로 잘 먹혔다. 이처럼 사소한 순간부터 시작해서 설득의 미학을 조금씩 음미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