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엡스타인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리뷰
1. 요즘에는 융합형 인재다 뭐다 해서 대학 차원에서도 많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전문화된 인재에 대한 믿음직한 인식은 아직 유효해 보인다. 사실 어쩔 수 없다. 우리나라는 고도화된 기술 중심의 재화를 생산하고 있고, 실제로 수요도 많고 성공 사례도 많기 때문이다. 입에 풀칠하는 데에 전문화와 기술만큼 명료한 대답을 내놓는 경우는 없다.
2. 따라서 아무리 창의적 인재상을 강조한다 한들, 10대들이 이공계와 공무원 준비로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유튜버라면 모르겠지만. 여튼 지금의 중고등학생들은 일찍부터 전문화의 길로 들어선다. 그들은 농구와 밴드 동아리를 하는 대신 코딩과 과학 실험을 하면서 스펙 갖추기에 힘쓴다. 놀랍게도 최근 모교에 교생실습을 갔다 온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1만 시간의 법칙 아래 유년기부터 전문 교육을 받아온 운동선수의 신화가 현대화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3. 여기에는 "일찍부터 준비해서 한 분야를 마스터하는 것이 유리하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물론 맞다. 수많은 스포츠 선수와 체스 선수가 이를 증명해 왔다. 그렇다면 이런 전문화 훈련의 이익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될까? 천재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청소년기의 빠른 교육을 통해 훌륭한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 제목에서부터 눈치챘겠지만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의 대답은 "NO"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인생은 스포츠와 체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4. '늦깎이' 천재란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경험, 즉 '샘플링'을 통해 기초 체력과 흥미를 쌓고, 뒤늦게 자기 분야를 결정해 성공을 이룩한 사람이다. 대표적인 예가 책의 표지에 있는 로저 페더러이다. 그는 유년 시절 다양한 운동을 하면서 자기만의 접근법을 찾을 수 있었고, 그것을 테니스에 적용하여 절대적인 연습량이 적었을지라도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다. 한편 타이거 우즈라는 조기 전문 교육의 사례는 그나마 스포츠라서 가능한 것이다. 그 이유는 골프, 테니스, 바둑, 체스와 같은 것들은 매우 제한된 상황에서의 훈련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생에서 위 스포츠와 똑같은 형태의 지능과 판단력을 요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리와 경제를 읽고 사업과 연구를 하는 건 창의적이고 종합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조기 교육보다 샘플링 과정이 더 넓게 효과적인 이유는 세상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은 특수 사례에 속한다.
5. 어린 시절부터 20대까지 다양한 공부를 하다가 뒤늦게 분야를 옮겨 성공한 사례는 생각보다 더 빈번하다. 고흐와 고갱, J.K. 롤링도 비슷한 실패 과정을 겪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것이 설명하기 나름이고 특정 사례만을 발췌한 것이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전공을 일찍 선택하는 대학일수록 이직 가능성이 높다는 자료를 제시한다. 나아가 교사의 이직 또한 각 학교의 성취 수준과 관계없이 새 학교의 학생들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직무 적합도'를 측정하기 위한 샘플링 과정이 더 나은 선택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늦깎이 천재들이 성공하는 이유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6. 하지만 하나라도 더 알아야 앞서가는 초전문화의 시대에 제너럴리스트는 사치가 아닐까?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전문가의 눈에 보이지 않던 문제가 외부인의 통찰에 의해 풀리기도 한다. 머신 러닝 개발의 도전 과제들이 올라오는 캐글(Kaggle)에서 이를 쉽게 볼 수 있다. 건강 관련 경연을 이기는 사람들은 의학, 생물학 교육을 받지 않았다. 단지 개발자의 입장에서 관심을 갖고 창의적으로 문제에 접근했을 뿐이다. 연구자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전공을 다양하게 옮긴 연구자들일수록 창의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색다른 지식 조합을 통해 장기적으로 인류의 지식에 더 도움이 되는 논문을 작성한다. 책은 교조적인 믿음과 좁은 시야를 만들어내는 전문가의 '친숙한 도구'를 경고하고 단순한 관점과 비유로 접근하는 '의도적인 아마추어' 개념을 강조한다. 책에 따르면 평생 한 분야만을 연구한 전문가의 의견은 경제 예측과 같은 복잡한 문제에 대해 크게 설명력을 갖지 못한다.
7. 물론 한 우물만 파는 것이 샘플링보다 열등하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적당히 자신의 선택과 위치에 만족하는 사는 사람들도 많다(돈만 챙겨 준다면). 결국 10대의 공부와 전공만으로 나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진짜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다는 것이 책이 주는 교훈이다. 나만 해도 그렇다. 학창 시절 나는 당연히 수학을 쓰는 직업을 가질 줄 알았다. 하지만 음악과 독서, 그리고 대외활동에서 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고, 지금은 음반 기획자를 목표로 노력하고 있다. 생각보다 나는 아이디어를 짜고, 대인관계를 구축하는 데 재능과 흥미가 있었다. 이는 수능과 전공 공부로는 절대 발굴될 수 없는 능력이다. 경험은 지식적으로 무언가를 얻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새롭게 발굴할 수 있기에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