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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Jul 15. 2019

엄마와 딸

의식이 흐르는 대로 생각 흩뿌리기

1

엄마는 학구열이 높은 사람이다. 너무 뜨거운 학구열에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데일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닐 정도였다.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온 덕에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회인이 되었고, 학구열을 바탕으로 각종 교육 자격증을 따 강사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이력서에 오랜 세월 '고졸'이라 적어야만 했던 것이 못내 서러웠는지 엄마는 4년 전 사이버대학에 입학했다. '과제 제출하는데 대뜸 편지를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 '시험 범위도 미리 정리해놔야지!' 혹시나 나이가 많아 쉽게 주눅 들진 않을까, 남보다 더 완벽을 기했으면 하는 걱정 어린 마음에 얼마나 많은 질책을 쏟아냈는지 모른다. 그래도 엄마는 좋다며 회사에서 퇴근하면 책상 앞에 앉아 수업 자료를 읽고 또 읽곤 했다.


그리고 작년 겨울, 엄마는 캠퍼스에서 학사모를 쓰고 졸업가운을 입고 고운 흰색 목도리를 하고선 학위증명서를 품에 안은채 한껏 웃고 있었다.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귀여운 자랑과 함께. "너는 복수전공 못 했지? 나는 했다!" 양갈래 머리를 하고 소녀 같은 미소를 띠며 캠퍼스를 힘차게 걷던 엄마의 모습이 나에겐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2

엄마는 아침형 인간이다. 해가 지면 눈꺼풀도 져가고, 해가 어슴푸레하게 뜨면 그만큼이나 헝클어진 머리로 바지런히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밤늦게까지 눈을 뜨고 TV 채널에서 나오는 영화를 즐겨보던 나와 아빠와는 생활 리듬이 완벽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던 엄마가 요즘 우리 집에서 가장 늦게 잠드는 사람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엄마가 이번엔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학원에서 자격증 시험 대비로 매일 쪽지시험을 보는데 주변 사람들에 비해 빨리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속상한지 매일같이 흰 종이가 깜지가 될 정도로 한자를 쓰고 또 쓴다. '오늘은 3개 틀렸어' '오늘은 그래도 1개만 틀렸어'라며 나에게 신세한탄이란 이름의 일종의 '보고'를 한다. 나는 잠자코 듣다 '잘했네' '괜찮아'라는 대답을 던져줘야 한다. 엄마의 입버릇이 되어버린 표현을 빌리자면 당신의 보호자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3

나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독서광은 아니지만 마음에 드는 내용의 책이면 앉은자리에서 3번을 완독 했다. 글자를 소리 내서 읽는 것도 좋아했다. 입안에서 구르는 한글이 달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초등학교 국어시간에 책 읽기를 시킬 때면 나는 선생님께 꼭 첫 번째로 뽑힐 수 있도록 손을 가장 빠르게, 가장 높이 들곤 했다. 실수만 하지 않으면 그날 읽을 분량을 혼자 전부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등단한 수필가였던 엄마를 보고 자라서인지 글을 쓰는 것도 좋아했다. 글짓기 대회는 내가 가장 빛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나의 글인지, 남들이 읽고 싶어 하는 글인지를 깨닫는 데는 좀 오래 걸렸다. 내 글쓰기 '보호자'가 당근을 좀 줬어야 말이지.


4

나는 일본어를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대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배웠다. '내가 가장 나이가 많지 않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없이 어리석었던 걱정을 품고 학원에 히라가나를 처음 배우러 갔던 날, 강의실에 먼저 앉아있던 40대 언니를 보고 우리 엄마를 떠올렸다. 내가 엄마의 대학교 진학을 끝내 말리지 못한 것도, 지금의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응원할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그때 스치듯 지나간 언니 덕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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