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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추억 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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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Nov 03. 2018

엔딩

밤새 드라마를 봤다. 좋지 않은 첫인상을 품은 두 남녀가 숱하게 오해를 하고 여러 번 다툰 끝에 결국엔 서로를 보며 웃는 결말. 하나같이 똑같은 흐름으로 진행되는 드라마 몇 작품을 연달아 보면서 나는 매번 남자 주인공을 사랑했고 여자 주인공을 사랑했다. 그들이 마주 서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웃고 울고 떠드는 모습을 사랑했다.


눈을 감으면 연인이 떠오르고, 눈을 뜨면 연인이 보이지 않아 괴로워하는 장면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다른 이의 앞에서 보이는 연인의 미소를 먼 발치에서 보며 울고 분노하는 장면에서는 쾌감을 느꼈다. 그러고보니 나는 누군가를 그토록 보고파했던 적이 있던가. 질투했던 적은 있던가? 아마 없었지. 그리움도 질투도 나는 참 열렬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과자가 마냥 짜게만 느껴졌다.


'만날까?'


오랜만에 받은 문자 한 통. 나는 이 문자를 처음 봤을 때 숨을 쉬고 있었다. 매일 보는 스팸 문자, 알람, 스케줄의 알림마냥 세 글자와 하나의 물음표가 내 눈 너머로 가볍게 건너왔다. 그리고 사흘 뒤에 나는 문득 그 문자가 왔었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내고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그 세 글자와 하나의 물음표만이 하얀 공간 안에 갇혀있었다.


'왜?'


그제야 나는 한 마디, 머릿 속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전날 본 드라마 속 연인의 감정이 혹시 내게 전이된 것은 아닐까. 나는 아마 그를 오해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하지만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았다. 감정은 전이되었을 지언정, 기억은 조작되지 않았기에.


인적이 드물었던 버스 정류장. 그 날 코트 주머니 안에서 맞잡고 있던 두 개의 손 안에서 감돌던 온기가 다시 저릿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온기는 딱 그것 뿐이었다. 내 마음에도, 네 마음에도 아마 그보다 더 뜨거운 온기는 없었다.


"내일 오후까지 남해안과 제주도를 중심으로 매우 강한 비가 내릴 것으로 보입니다."


그날은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나는 영화관에서 밤늦게 돌아온 다음날 지독한 감기에 걸려 집 밖을 나갈 수 없었다. 오전에 잠깐 시끄럽던 스마트폰은 몸을 겨우 일으킨 낮이 되자 잠잠해졌다. 잠금 화면 속에 네 이름은 없었다. 그래도 괜찮은 사이였다. 그래도 괜찮은 연인이었다. 그래도 괜찮은 너, 그리고 나였다.


"오늘과 내일은 도로에 안개가 짙게 낄 것으로 보여 안전 운전 하셔야겠습니다."


흐릿하게 보이는 화면을 엄지 손가락으로 무겁게 밀며 네 이름을 찾던 그 순간에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더라면, 우리는 혹시 어제 화면 속에서 울고 웃던 연인처럼 뜨거울 수 있었을까.


'만나요'


나는 답장 버튼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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