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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추억 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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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Jul 15. 2019

어느 날 그 사람

팔이 무겁게 떨어지며 침대 시트를 가볍게 쳤다. 구김이 간 시트를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쏟아지는 머리칼에 눈 앞이 가려졌다. 어릴 적 숨바꼭질을 했을 때처럼 나는 또 나만 모르게 숨었다. 내 손가락 끝마디를 가볍게 바꿔 만지던 너의 긴 손가락들이 어둠 속에서 환영처럼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네 손이 아른거릴 때마다 내 손끝이 저려왔다. 나뭇잎 위로 쏟아지는 햇살 덕분에 생긴 밝은 그늘. 너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 네가 힘들 때 내 곁에 머물러줄래?


어떤 마음이든 정중하게 건네는 네가 너무나 좋아서 나는 매번 도망치기 바빴다. 가까울수록 나를 더욱 뜨겁게 덮치는 너의 단어들이 내 숨을 앗아가곤 했다. 빗물이 흐르는 창 너머로 흐릿해진 널 바라볼 때면 나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미로 속에서 나는 늘 위로를 찾고 있었다. 너는 그보다도 더 어려운 미로였고, 위로였다.


- 네 웃음을 평생 사고 싶어.


겨우내 꽁꽁 숨겨왔던 말이 무엇인지 미리 알았다면 어쩌면 듣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 자책감이 들었다. 나는 너란 미로를 풀 수도, 너란 위로를 받을 수도 없는 사람인데. 나는 내 웃음을 너에게 줄 수 없는데.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눈을 떴다. 머리칼 사이로 잘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손을 괜히 쥐었다 폈다 했다. 그때 고개를 주억거렸던가?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다. 언덕 위 넓은 그늘을 자꾸만 흔드는 커다란 나무 앞에 선 나는 또 나만 모르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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