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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Jan 08. 2020

아직은 어색한 2020

두서없음

2019년 12월 31일. 우연히 해외에서 잠시 한국에 들어온 친구가 나의 자취방에 묵게 되었다. 연말 카운트다운과는 정말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던 나는 친구 덕분에 처음으로 케이크와 치킨을 앞에 두고 날짜가 바뀌는 순간까지 요란하게 숫자를 세었다. 모니터 화면 너머로 제야의 종소리가 들리자 케이크 위에 꽂힌 촛불을 힘껏 끄고 간절히 기도했다. 부모님의 건강을 먼저 빌고, 동생의 건강을 그다음으로 빌고, 부모님의 행복을 먼저 빌고, 동생의 행복을 그다음으로 빌었다. 나는 뭐 알아서 살겠지.


북적이며 연예인들이 보내는 새해 인사를 지켜보던 친구가 대뜸 물었다. "올해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어?" 나는 주저 없이 '지금'이라고 대답했다. 내 사정을 잘 알아 그런지 친구는 그냥 웃어주었다. 다시 친구가 물었다. "그럼 가장 좋았던 순간은 언제였어?" 한참 고민을 하던 나는 3가지 장면을 읊었다. "그래도 좋은 기억이 있어서 다행이다." 긍정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2018년 중반 즈음 SNS에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점점 사람하고 대화하는 게 힘들다. 나와 다른 생각을 마냥 듣고만 있는 게 괴롭다. 대답하자니 피곤하다. 귀찮다.]


대체 어떤 상황을 겪고 나서 든 생각인지, 어떤 하루의 끝에서 남긴 생각인지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다. 이 정도면 충분히 어른이라고 괜스레 어깨를 펴보던 일상의 반복. 아마 그런 날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새삼 돌이켜보니 최근 들어 다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타인과의 대화가 피곤하다. 나와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더라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향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피곤해진다. 타인의 생각을 인정하는가 부정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상대하기 피곤하다. 남의 생각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남의 생각이 정말 지독히도 지루하다. 아무래도 이기적으로 태어나서 잠시 이타적인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다가 제풀에 지쳐 다시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대학생 때 제대로 개과천선을 했어야 했는데. 대학원을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상경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란 걸 모르고 살던 삶에 후회가 점점 하나둘씩 늘어간다.


다시 이기적인 사람으로 돌아가야겠다 마음먹고 나니 그래도 좀 편해졌다. 불면증, 소화불량, 우울증 내가 나에게 이만큼 소홀했었구나 하나씩 자각하니 오히려 정신이 맑아진다. 애당초 배려니 다정함이니 그런 정 많은 단어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참 오래도 끼고 살았네 싶다. 다 오지랖이었지 뭐. 남들 인생에 관심 좀 끄고 내 인생에 집중 좀 해야지. 이제 진짜 나에게 착하게 살아야지. 너 말고 나를 사랑해야지.


전화부를 한 번씩 초기화하고 번호를 변경할 때마다 대단한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SNS로 다 연결되어 있는 이 대단한 21세기에 나를 찾고 싶다면 언제든 DM을 보내면 될 일이지. 굳이 내 번호가 필요할까?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내 번호를 그들에게서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들의 번호를 지운 거였다. 참 복잡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내 멋대로 해석하고 그걸 꽤 괜찮은 답이라 믿는 건 천성인가 보다. 이제 더는 번호를 바꾸기가 무섭다. 이미 전화부엔 가족들, 절친한 고향 친구 여섯 말곤 남아 있는 번호가 없지만.


누가 뭘 어떻게 좋아한다는 건지 알 수 없는 하트 마크만 남은 SNS도 이제 질린다. 근황을 묻는 연락마저도 불필요하게 만드는 SNS가 오히려 삶을 삭막하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무의미한 관심 표현이 전부인 SNS에 광적으로 매달렸던 과거의 나를 생각하니 좀 미안해졌다. 이제라도 그만해야지.


그래서 2020년의 목표는 SNS 전부 탈퇴하기, 나를 사랑하는 일기 쓰기로 결정했다. 살고 싶으면 살고 싶다고, 죽고 싶으면 죽고 싶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없어 거짓으로 하하호호 웃느라 삶이 더 피폐해져가고 있다면 하다못해 종이에라도 털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작은 하트 위로보다 열심히 버티고 있는 안쓰러운 노력을 느낄 수 있는 글씨체에 다시금 위로받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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