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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추억 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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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Dec 12. 2015

마른 일상

빨래를 널며 여자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직 많이 어린가?'. 어젯밤 카페에서 나눈 친구와의 대화를 다시 떠올려본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탈수가 덜 된 수건을 탁탁 털어본다. 사실 이렇게 가볍게 털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규칙 없이 널린 빨래들 틈새로 나와 살짝 기지개를 켠다. 아직 정오가 되기 전이다.


여자는 치약을 짠 칫솔을 입에 물었다. 거울을 바라보며 양치를 하는 건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거울 속 너머의 손을 향해 '좀 더 안쪽까지 움직이는 게 좋을텐데.'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거울 속의 또다른 자신과 시선을 정확히 맞춘다. 그리고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한 순간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아무래도 가볍게 털어내질 못한 모양이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것이,

더이상 '일상'이 아니게 되었다.


- '너만 모르고 있던 거야 이 바보야.'


그런 한심하다는 듯한 어조로 쏟아지는 말에도 사실 별 감흥이 일지 않던 여자였다. 마치 남의 일이라는 것처럼 본인의 일에 관한 이야기를 그저 잠자코 듣고 있었다. '헤어짐'이라는 게 사실 별 거 아니구나. 아마도 여자는 그때까지도 줄곧 이 이상 무슨 생각을 해야 옳은 것인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정말 '바보'가 된 것처럼.


사실 여자는 좋다고 시작한 연애가 아니었다. 하지만 시작도 마음대로였던 남자는 끝도 마음대로 내버렸다. 멋대로 일상에 침범해 어느새 일상 그 자체가 되었던 남자가 사라졌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일상 속에 여자가 남았다. 본인의 일상인데도 누군가가 두고 간 셈이 되었다.


참 이상하지.

이상한 일이야.

느껴본 적 없는 참 이상한 느낌이야.


주인을 잃은 일상 속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야. 마른 수건으로 젖은 입술 주변을 대충 닦아내던 여자는 이내 온몸이 무너져내려 결국 수건에 얼굴을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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