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리뷰
16년간 라이프지의 필름 원화 관리자로 일해온 월터 미티(벤 스틸러). 오랫동안 그의 삶을 지탱해준 라이프지가 폐간을 눈 앞에 두게 된다. 마지막 호의 표지는 유명 사진가인 숀 오코넬(숀 펜)로부터 온 삶의 정수가 담긴 25번째 필름이 될 예정이다. 하지만 편지에는 25번째 필름이 없었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녀 주소지가 불분명한 숀과 연락할 수단 또한 없었다. 평소 곤란한 일이 생기면 줄곧 상상 속으로 도망치기 바빴던 월터가 직접 숀을 찾기 위해 그가 남긴 증거를 토대로 모험에 나선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숨기고 살았던 평범한 회사원이 특별한 계기를 통해 자신을 찾아간다는 간단한 이야기 구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안을 유심히 살펴보면 급격히 디지털화되는 세상 속 아날로그들의 생존법이 보인다. 영화 속 월터는 전형적인 아날로그형 인간이다. 스마트폰이 보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폴더폰을 소유하고 있으며, 사진 한 장을 뽑기 위해 수많은 과정이 필요한 필름 원화 업무를 16년간 고집하고 있다. 이제는 아날로그가 삶이 되버린 월터에겐 디지털이란 이름의 고난으로 가득 찬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고난의 시간을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2007년을 마지막으로 폐간을 한 라이프지와 흡사하다. 라이프지는 아쉽게도 고난의 시대를 이겨내지 못했다. 71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녔지만 TV의 출현으로 시작된 디지털화 폭풍 속에서 인지도가 하락하기 시작했고 정간과 복간을 반복하며 결국엔 폐간하고 말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 잡지사의 폐간으로 아날로그는 디지털에 의해 영원히 작별을 고한 것처럼 보였다.
월터는 회사 동료인 셰릴(크리스틴 위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지 못하고 상상 속에서 홀로 사랑을 꿈꾼다. 결국 월터는 인터넷 세상 속 데이트 사이트로 눈을 돌린다. 직접 대면하는 것보다는 기술 발전에 힘을 빌려 고백을 하기로 한 것이지만 그것조차 녹록치 않다. 월터는 사람 간의 거리에 대해서 고민한다. 과거엔 누군가를 알기 위해선 직접 다가가는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타인의 정보를 쉽게 취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물리적 거리에 대한 제약이 사라진만큼 쉽게 취득한 정보의 조합은 자신만의 공상을 불러왔고 사람 간의 거리가 모호해지게 만드는 두려움을 만들고 말았다. 월터의 공상은 자신이 잘 알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가족에게도 거리를 만들고 만다.
멈추지 않는 공상을 끊기 위해 월터가 한 선택은 지극히 아날로그스럽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피하는 것이 아닌 용기를 갖고 직면해 원인을 깨닫고 풀어가기 시작한다. 월터가 실천한 최초의 시도는 라이프지의 모토인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To see the world, things dangerous to come to, to see behind walls, to draw closer, to find each other and to feel, that is the purpose of life).’와도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순간이다.
이 영화를 제작한 벤 스틸러는 감독보다는 배우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가 데뷔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태양의 제국>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약 60개의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만 보면 배우의 이미지는 보다 확고해진다. 하지만 메가폰을 잡는 순간 보여주는 남다른 스타일은 감독으로서 또한 부족함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감독 데뷔작인 <청춘 스케치>부터 그가 고수하는 스타일은 ‘익숙함의 해체’다. 스틸러 감독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익숙함과 이별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유지했던 친구의 경계를 허물고 연인으로 새 삶을 시작했던 <청춘 스케치>의 리레이나, 평생 최정상의 모델로 남을 줄 알았지만 패션계에서 은퇴하기에 이르는 <쥬랜더>의 데릭 등이 그러했다. 하지만 전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독특한 존재들로서 공감이 어려운 존재들로 그려져 왔다. 반면 월터는 회사원이다. 회사 생활은 아무런 영감을 주지 못하고 심지어 해고될 위기에 쳐해 고민한다. 16년간 변치 않던 그지만 결국 변화를 꿈꾸게 된다. 흔히 볼 수 있는 회사원의 모습이다. 하지만 스틸러 감독의 작품이기에 평범한 직장인의 등장은 더욱 각별해 보인다. 그린란드에 도착한 월터는 모험에 나서길 주저한다. 상사를 뒤로한 채 공항으로 뛰쳐나왔던 순간의 카타르시스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이는 곧 등장할 가장 큰 도약을 위한 숨 고르기였고, 스틸러 감독은 이 순간을 기점으로 평범한 회사원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리기 시작한다. 미지의 장소인 우주로 유영 준비를 하는 우주비행사가 그렇듯 월터에게도 용기가 필요했다. 움추러든 감정에 기름을 붓듯이 데이비드 보위의 <Space Oddity>가 흘러나오며 감정선에 불을 지르기 시작하고 위대한 직장인은 모험으로 출사표를 던진다.(데이비드 보위는 전작 <쥬랜더>에 출연한 바가 있다). 스틸러 감독은 전작에서도 다양한 팝컬처를 인용했지만, 이번 작품만큼 매력적으로 그려지진 못했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미트 페어런츠> 등으로 입지를 다진 벤 스틸러. 배우로만 보던 익숙한 시선을 내려놓고 새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면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