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워 바디> 리뷰
오십유오이지우학(五十有五而志于學), 삼십이립(三十而立)이라 했던가.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어 30세에 독립했다는 공자와 달리 이미 이립(而立)을 넘은 31살 자영(최희서)은 여전히 행정고시(행시)의 늪에 빠져있다. 좁은 단칸방으로 규정된 생활 반경에서 자영에게 요구되는 체력은 남자 친구(오동민)와 섹스를 하는 순간뿐이다. 하지만 그 뜨거움조차 체력 부족이란 벽에 막혀 순식간에 식어 버린다. 유일하게 두 사람을 이어주던 뜨거움이 사라진 것을 느낀 남자 친구가 자영을 떠난다. 홀로 남은 자영 앞에 누구보다 뜨겁게 달리는 현주(안지혜)가 나타난다. 자영은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열정적인 현주에게 매력을 느끼는 동시에 현주의 뜨거움을 갈망하게 된다.
갈망은 <아워 바디>를 가로지르는 주제이다. 자영이 행시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뒤로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8년간 자신에 쌓여온 충족되지 않는 갈망뿐이었다. 방향을 잃은 자영 앞에 등장한 현주는 꺼지지 않는 태양과도 같았고 자영은 그녀를 통해 이전에 충족시키지 못했던 갈망을 충족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얻게 된다. 현주의 도움을 통해 자영의 나날이 늘어가는 실력은 그녀의 몸을 통해 드러난다. 곧 있으면 자영이 원하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사고로 현주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현주를 잃고 강박적으로 달리기에 매진하는 자영. 하지만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방황하는 갈망은 자영에게 현주의 발자취를 쫓게 만든다.
현주가 달려온 트랙을 달리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영은 현주에 대해 알아간다. 그녀에 대해 알아갈수록 자신이 동경했던 모습 뒤에 숨겨져 있던 아픔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간이 갈수록 현주를 향한 마음은 점점 커져가고 깊어가는 감정을 클로즈업된 카메라에 담고 있다. 인물이 보여주는 아주 미세한 감정조차 카메라에 담으려는 이성은 촬영감독의 날카로움이 드러난다. 그는 어린 나이에 차가운 현실 속에 놓인 소녀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작 <들꽃>에서도 유사한 시선을 보여줬다. 인물의 아픔과 고통을 전시하지 않고 누 구보 다 가까운 거리에서 감정을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한다. 현주와 첫 대면에서 그녀를 표현하는 자영의 시선을 솜털이 보일듯한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담아 현주의 건강한 신체를 자칫 성적 대상화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촬영감독의 섬세함을 보인다.
<아워 바디>는 뜨겁지만 순식간에 지나간 여름에서 시작해 변화의 계절인 가을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 계절이 바뀌면서 자영에겐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데 정 부장(장준휘)과 섹스를 하는 장면이 자영의 변화를 가장 크게 감지할 수 있다. 자영의 극적인 변화에 혼란스럽다면 당연한 것이다. 사실 누구보다 혼란스러운 것은 자영 자신일 것이다. 자영 또한 처음에 현주를 만나고 변화해가는 자신에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자영의 앞에서 갈 길을 제시해 주던 현주가 사라지고 자영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한다. 자영의 방황에 회사 동기의 괴롭힘과 꾸준히 챙겨줬던 민지(노수산나)의 불신 등이 겹치면서 자영은 점점 한계에 몰리게 된다. 폭발 직전의 자영은 어김없이 달리기 위해 밤길로 향한다. 어두운 거리를 가로질러 현주가 죽은 그 장소까지 달려온 자영은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게 된다. 뒤를 돌아본 자영의 눈에 현주가 보이고 그들은 서로에게 질문한다. "너는 달릴 때 무슨 생각 해?".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다만 현주와 대화한 순간 자영 또한 알게 된다. 자신이 동경했던 현주 역시 힘겨운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청춘이었다는 사실을...
<아워 바디>는 성공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좌절하던 청춘이 달리기를 만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수많은 청춘을 위한 영화지만 일각에선 주연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 영화로 보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물론 여성이 현실에서 처할 수 있는 부조리한 장면이 존재하는 것은 부정할 수없지만 자영의 주된 관심사는 기존 관습과 대립이 아니다. 오히려 나도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든 이들에게 호소하고자 고민하는 청춘영화에 가깝다. 자영이 현주를 동경하게 된 계기가 그녀에게서 전해지는 압도적인 노력의 크기를 절감한 순간이었던 것처럼 인정(認定)이 궁핍해져만 가는 무한경쟁 사회를 비판하고자 하는 한가람 감독의 의지가 엿보인다. 결실 없는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인 인식 속에서 스러져가는 청춘들은 자연스럽게 현주를 떠올리게 하고 자영이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순간은 같은 청춘으로써 슬픈 예감까지 들게 한다. 하지만 자영은 다시 한번 달려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지금까지 자영은 그녀의 어머니(김정영)로 대변되는 윗세대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 마지막 가족 식사에서조차 자영은 어머니에게 인정받는 것을 실패한다.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영의 동생 화영(이재인)은 자영과 같이 달리기 위해서 도전해보겠다고 말한다. 자영의 노력은 윗세대들에겐 인정받지 못했지만 다음 세대들에겐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다음으로 이어지는 호텔에서 자위를 하는 자영의 모습은 뜬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자영이 누군가에겐 영감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안정감을 느끼고 내가 이만큼 달릴 수 있게 됐다는 자기 위로인 동시에 처음으로 변화한 몸을 확인하며 자존감을 확립하는 순간이다.
현주와 자영이 끊임없이 달리는 모습은 로버트 저메키스의 <포레스트 검프>가 연상된다. 미국 역사를 관통하며 다양한 사건을 겪은 검프는 단짝이자 사랑했던 제니와 힘겹게 재회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길지 않았고 제니와 함께 할 수 없다는 현실에서 도망가기 위해 검프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한다. 긴 시간 동안 묵묵히 달리던 검프가 어느 순간 자신의 추종자들을 돌아보며 “이제는 집에 돌아가야겠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자영이 현주와 같은 구도 상에서 선택을 고민하는 장면과도 겹쳐진다. 자영과 포레스트는 목표를 잃은 이들이 달리기를 통해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정했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지니지만 3년 2개월 14일 16시간이 걸린 포레스트보다 자영이 좀 더 빨리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라도 언젠간 자신의 길을 찾아가기 위한 모든 이들에게 <아워 바디>는 길잡이를 자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