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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ckingJ Feb 07. 2022

관습의 틀이 만든 부작용

<엔칸토:마법의 세계>

출처: 매일경제

디즈니는 1937년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을 기점으로 장편 애니메이션 전성기의 서막을 열었다. 물론 작품의 완성도에 따라 부진과 약진을 번갈았지만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의 정서에 나름 잘 적응해왔다고 본다. 80년간 이어온 디즈니 작품의 핵심 주제인 가족 또한 전통적인 의미에 머무르지 않고 폭넓게 해석하고자 하는 모습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디즈니 6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인 <엔칸토:마법의 세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들로 가득한 세계라는 의심이 든다. 


(※ 영화 <엔칸토:마법의 세계>와 <토이스토리 3>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아파야 디즈니?

디즈니 주인공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아픔을 겪으며 살아간다. 결혼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진정한 자신을 숨겨야 했던 뮬란이나 억제할 수 없는 마법의 힘 때문에 유일한 가족과 관계를 단절할 수밖에 없던 엘사처럼 말이다. 하지만 미라벨(스테퍼니 비어트리즈)의 경우, 아픔을 겪는 양상이 다른 작품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디즈니 인물들이 겪는 아픔은 마치 재해처럼 그려져 왔다. 피하고 싶어도 방법을 모르기에 처음엔 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패를 통한 성장하고 다시 한번 아픔이 찾아왔을 땐 완전히 새로운 인물로서 지혜롭게 이를 극복해 나간다. 미라벨의 이야기도 비슷한 짜임새를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아픔은 철저히 의도됐다는 점에서 큰 차이점을 지닌다. 

마드리갈 가족은 신비로운 능력으로 지역 사회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한다. 미라벨만이 가족 중 유일하게 능력을 받지 못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자랑스러운 마드리갈의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위는 차가운 시선으로 가득하고 가족들 또한 미라벨의 노력을 비웃고 폄훼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는 마치 고생이 곧 위대한 결실로 이어진다는 ‘아파야 청춘이다’식의 전개를 통해 미라벨의 아픔을 의도적으로 증폭시키며 치졸한 방식으로 그녀 자신이 변화하게 될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비치지 않는다.  <엔칸토:마법의 세계>가 디즈니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이야기의 마무리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라 장담한다. 지속적으로 자행된 아픔을 겪은 인물이 다다르는 결말을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를 통해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출처: 네이버 영화

#내로남불

의도적으로 인물의 아픔을 강요하는 이 영화가 왜 불편함 없이 다가올까? 하나는 <엔칸토:마법의 세계>가 뮤지컬 영화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주변 인물들의 내로남불에 있다. 뮤지컬 영화는 노래를 통해 이야기와 캐릭터를 간결하고 아름답게 전달할 수 있지만 상황 자체가 순화돼 표현되곤 한다. 

<겨울왕국>의 ‘Let it go’는 누가 뭐라 건 아름다운 노래다. 진정한 자유를 찾은 엘사의 모습을 주제곡으로 완벽하게 표현해냈기 때문인데 여기에 노래가 없어진다면 어떨까? 자유를 찾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해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강제로 고립시키려는 한 소녀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눈에 들어올 것이다.

<엔칸토:마법의 세계>의 주변 인물들은 자신을 대표하는 주제곡 속에 미라벨과 함께 등장한다. 미라벨의 아픔과 연관된 그들을 소개하는 동시에 노래를 통해 갈등을 손쉽게 해소하려는 안이함이 보인다. 심지어 주제곡이 가족 개개인의 아픔에 초점이 맞춰져 정작 주체가 되었어야 할 미라벨과의 갈등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리고 만다. 

출처: The Mary Sue

#About Bruno(브루노에 대하여)

미라벨이 작중에서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게 아픔을 겪고 있다면 그녀의 삼촌 브루노(존 레귀자모)는 관객에게까지 고통을 받는다. 한국에서 “Shut up Malfoy!(입 닥쳐 말포이!)” 만큼 유명해진 <루카>의 “실렌시오 브루노(Silenzio Bruno, 닥쳐 브루노)”가 엉뚱한 지점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루카>의 브루노는 루카 내면에 자리 잡은 두려움을 비유하는 가상의 존재였지만 <엔칸토:마법의 세계>에선 이름조차 발설하면 안 될 볼트모트급의 인물로 묘사된다. 결국 작중 실존하는 인물에게 이전 작품과의 연관성을 부여하면서 은연중 관객에게까지 브루노의 잘못된 첫인상을 각인시키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브루노는 미라벨 못지않은 상처를 지니고 있는 것을 알게 돼 굳이 이전 작품의 설정을 가져와 캐치프레이즈 정도로 소비되도록 만든 이유에 대해선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출처: 지니

# 관습

지금까지 디즈니는 선악의 대립 구도, 수동적인 여성 서사, 가족의 다양성 등 오랜 기간 이어져 온 관습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왔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것처럼 변화는 천천히 진행됐지만 성과라 칭할 만큼의 작품들도 자주 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아직 바꾸지 못한 관습이 남아있는데 바로 ‘Happily Ever After(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무리되는 결말이다. 물론 어린이를 주타겟으로 제작하는 영화에 DC 세계관에서 볼 법한 결말을 기대하진 않는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가지 않아도 애매모호한 결말이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디즈니 산하에 들어간 픽사의 <토이스토리 3>의 결말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토이스토리 3>의 결말은 앤디와 우디의 이별로 마무리된다. 평생 앤디와 함께 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이라 믿어 온 우디에겐 마치 불행과 같은 결말일 것이다. 하지만 <토이스토리 3>의 결말이 어떤 영화의 마지막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이는 픽사가 더 이상 애니메이션이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닌 나이를 불문한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한층 성장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심금을 울리는 장면은 1995년 <토이스토리 1>이 개봉했을 당시 아이로서 오프닝 시퀀스를 본 현재의 어른들에게 주는 선물 같은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지금까지 <엔칸토:마법의 세계>에 대해 많은 쓴소리를 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엔칸토:마법의 세계>는 충분히 좋은 영화였다. 주제곡인 ‘We don’t talk about Bruno’는 알라딘에 이어 디즈니 역사상 두 번째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영상미나 집이 마치 생물처럼 움직이는 모습도 흥미로웠다. 다만 이 좋은 영화가 단순히 눈과 귀로 즐기는 것에 멈춘 것에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오랜 기간 이어져 온 관습은 쉽게 지울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는 계속될 거라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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