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한다는 것
만일 우리가 타인의 내부로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면, 일단 그 바깥에 서보는 게 맞는 순서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 '바깥'에 서느라 때론 다리가 후들거리고 또 얼굴이 빨개져도 우선 서보기라도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 김애란 /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中 -
우리가 일상에서 생각보다 쉽게 그리고 자주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이해'다.
"이해했어" 또는 "너를 이해해"라는 말로 수긍이나 위로의 의미를 전달하기도 하고, "왜 이렇게 이해를 못해"와 같은 말로 질책을 하기도 한다. 때론 "이해했어?"와 같이 질문을 건네기도 한다.
과연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사전을 보면 '이해'를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함', '깨달아 앎. 또는 잘 알아서 받아들임',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임'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다는 것을 넘어서 받아들인다는 의미에 있다.
즉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단순히 어떤 사실을 파악하는 것을 넘어 그 사람의 상황이나 환경, 생각 등을 모두 경험하는 것과 같고,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말을 이해한다는 건 그 말 자체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뿐 아니라 그 사람의 언어 자체를 받아들여야만 가능하다. 달리 말하면 한 사람을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건 어찌 보면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도 있다.
이해는 타인과의 관계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때로는 시간이 흐른 뒤에 과거의 내 모습이나 그에 비교된 현재의 모습 또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내 모습 등 나조차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나 스스로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는데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그렇기에 완벽한 이해란 없으며 우리가 종종 사용하는 "왜 이렇게 이해를 못해" 따위의 말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때때로 주변을 살펴보면 나이가 많거나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할수록 스스로의 프레임으로 상대방을 가둬두고 판단하거나 그에 맞는 행동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또 그 기대에 벗어나는 경우에는 실망하거나 심지어 화를 내기도 한다. 그리고 다 아는 척 우월감에 빠져 쓸모없는 위로나 조언을 건네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안다는 것을 이해로 착각해 너무나 쉽게 내뱉는 이런 말들은 어찌 보면 오만함이고 상대에 대한 무례함이다.
돌이켜 보면 나 또한 앎과 이해를 구분하지 못하고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 오만과 무례를 저지를 때가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착각으로 피해를 보면서도 정작 나 스스로는 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이해했어?"식의 질문도 상대방에게 이해에 대한 책임을 떠 넘기는 행위라고 말한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언어를 말 한마디로 상대방에게 이해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를 해야 할 책임과 부담을 느끼고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내가 제대로 설명했어요?" 또는 "내 설명에 부족한 부분 있어요?"와 같이 나에게 책임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한다.
비록 우리가 서로에 대해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더라도 이에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은 분명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작은 다름을 인식하는 것에 있다. 어떤 오래된 노래 가사("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어느 영화 제목처럼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우리는 서로 완벽한 타인이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릴 때 우리는 진정한 이해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