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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라키 Jan 18. 2021

지우개 찬스

내가 다니던 대학에는 등록금을 한 번 더 내고 한 학기의 기록, 정확히는 성적을 지울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우리는 그걸 지우개 찬스라고 불렀다. 지금은 훨씬 더 비싸졌겠지만 한 학기를 다시 등록해야 했기에 당시에도 400만 원이 넘는 명품 지우개였다. 보통 뒤늦게 정신 차리고 공부 좀 해볼까 하는 친구들이 재수강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눈물을 머금으며 한 번 씩 사용했다. 그 당시 다행히도 관련이 없던 나는 400만 원짜리 지우개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제도를 만들어놓은 것도 사용하는 것도.


그런데 졸업을 한지 한참이나 지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오히려 가끔씩 그런 지우개가 있었으면 할 때가 있다. 바로 인생의 지우개랄까. 긴 시간이든 스쳐가듯 짧은 찰나의 순간이든 지나고 난 뒤 밀려오는 후회나 자책감으로 말끔히 지울 수만 있다면, 한 번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순간들이 종종 찾아온다. 그건 내 말이나 행동일 수도 있고 기억일 수도 있다. 아마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순간들이 한 번씩은 있었을 것이다. 이불 킥 한 번 안 날려본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정말 아무 일 없던 듯 지운다고 해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때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닐 가능성이 크다. 안타깝게도 지금도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후회하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정작 지울 수 있다 한들 더 나아지지 않으면 결국은 제자리일 뿐이다. 아니 오히려 깨끗이 지운 자리일수록 더 약해져 있지 않던가. 그리고 지운 자리에 다시 쓸 때는 그 이전보다 훨씬 더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전의 경험과 기억이 중요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정말로 지워야 할 것은 우리의 지난 행동이나 기억이 아니라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실수와 실패를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 그나마 남아있는 기억 덕분에 다시 하는 실수가 조금은 덜 해진다. 만약 필요할 때마다 계속해서 지워간다면 우리는 항상 가장 큰 실수를 반복하고 지우고, 그렇게 약해져 갔을지 모른다.


물론 그렇다 해도 정말로 간절히 되돌리고 싶은, 지우고 싶은 순간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나도 많은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타깝게도 현실 속에 그런 지우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는 지우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잘못 쓴 곳은 더 굵고 진한 펜으로 덮어쓰고, 잘못 칠한 곳은 더 진한 색으로 덧칠하는 방법도 있었다. 의외로 감쪽같이 감춰지곤 했다.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지우고 싶은 마음이 들수록 이전의 실수를 덮어버릴 만큼 더 정확하고 더 진하게 다시 쓰고 칠하면 된다.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고 해 보기 전까지는 결과도 알 수는 없겠지만은, 혹시 모를 일이다. 그러다 보면 예상외로 훨씬 더 멋진 작품이 나올는지도.


Life is the art of drawing without an eraser. - John W. Gardn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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