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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라키 Mar 21. 2021

가상의 발

보이지 않는 믿음의 힘

어김없이 토요일 강습시간. 지구력으로 힘을 한 바탕 쭉 빼고 나면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볼더링 문제를 풀어낸다. 순서를 기다리며 다른 사람 풀이를 보고 있는 중에 역시나 강사님의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가상의 발! 가상의 발 해야죠!, 가상의 발이 그렇게나 중요한데..."


가상의 발. 이게 무엇인고 하니 벽에 매달리게 되면 경우에 따라 밟을 곳이 하나밖에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마치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벽에다 발을 가져다 대고 자세를 잡는 걸 의미한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싶겠지만 이 가상의 발 하나로 문제 풀이의 성패가 결정되기도 한다.


정확히 무슨 도움이 되는가 하면, 일단 벽이라는 것이 지지대가 되어준다. 비록 아래 방향으로 힘을 싣는 것은 안되지만 벽에 발끝을 대는 것만으로 몸의 움직임을 잡아주고, 필요에 따라 벽을 밀거나 차면서 좀 더 먼 곳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물론 반대로 힘을 주기 때문에 그렇게 엄청난 힘이 더해지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는 몸의 균형, 즉 무게중심이 달라진다. 클라이밍이 본디 몸의 무게중심을 조절해가면서 힘을 분산시키고 그렇게 조금 더 오래 멀리 이동하는 기술들이다. 하지만 벽에 매달린 상태에서 몸의 균형을 조절하기란 쉽지 않다. 두 손 두 발이 모두 어딘가를 잡고 밟고 있다면 그나마 낫지만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하면 매달려 있기에 바쁘다. 이럴 때 마치 발 홀드가 있는 것처럼 적당한 위치에 옮겨두면 신기하게도 몸의 균형이 맞아지면서 버티거나 힘을 내기가 더 수월해진다. 별 것 아닌 믿음 하나로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의지가 되는 것이다.


이 작은 믿음의 힘은 삶에서도 발휘된다. 인생에서의 가상의 발이랄까. 가족이나 친구 혹은 다른 그 누군가의 믿음, 혹은 내가 간절히 원하는 꿈이나 목표. 사람마다 각기 다르고 실제로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다. 무엇이든 간에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가 삶에 매달려 힘이 들거나 불안할 때 그만두거나 쓰러지지 않고 버티느냐 마느냐의 차이를 만들어 내곤 한다. 물론 너무 과하게 의지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가상의 발이 필요한 때는 위태로운 순간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 믿음이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하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가상의 발이 무엇인고 하면 바로 나 자신이다. 가끔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믿음이랄까. 그런데 가끔은 이 믿음 조차 약해져 흔들리는 위태로운 순간이 오기도 한다. 수 없이 나에 대한 반문이 드는 시간들이다. 그럴 땐 어쩔 수 없다. 그저 이 또한 지나가겠지 하는 새로운 가상의 발을 자연스럽게 들이미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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