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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라키 May 30. 2021

일요일의 당근

지난 주말, 오래간만에 청소를 크게 벌리고 정리를 하다가 쓰지 않는 것들을 몇 가지를 당근 마켓에 올렸다. 생각보다 빠르게 연락들이 왔고 평일에 시간이 안 되는 내 일정 때문에 이번 주말이 돼서야 거래는 모두 마무리됐다. 거래를 마치고 나서 후기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기분 좋은 뿌듯함이 생겨난다.


자주 하지는 않아서 아직은 37.4도 밖에 되지 않는 초보 당근러지만, 나만의 당근 거래에 원칙 중 한 가지를 얘기해 보자면 나에게 가치가 없는 것들은 돈을 받지 않는다(판매보다는 나눔의 목적이기 때문에). 물론 그렇다고 무료로 올리지는 않는다. 어차피 쓰지 않는 것들을 누군가 필요해서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난 이득이지만 무료로 올렸을 때 좋지 않은 경험들이 생기는 듯해서 가격은 천 원. 대신 거래할 때 돈을 받지 않고 그냥 드리는 편이다. 천원이 큰돈은 아니지만 그런 소소한 것에 감동해 주시는 분들도 계셔서 서로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도 있다. (또 한 가지 이점은 혹시나 사정상 일정을 변경해야 하면 무료로 드린다고 하면서 양해를 구하기도 좋다.)


물론 돈을 받고 판매하는 것들도 있다. 말 그대로 판매의 목적이다. 하지만 판매를 해서 생긴 돈보다는 이렇게 나눔을 하는데서 오는 보람이 훨씬 더 크고 오래간다. 떠오른 김에 비슷하게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를 소개해 본다.


첫 번째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선배들이 이매진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워너비앨리스팀의 'Better World' 프로젝트. 선행과 기부문화를 전파시킨다는 목적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소녀 앨리스는 길을 가다 소중한 지갑을 잃어버린다. 슬픔에 빠진다. 그 후 한 남자가 나타나 지갑을 주워 앨리스에게 연락한다. 앨리스는 그에게 지갑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얘기한다. 남자는 고민 없이 앨리스에게 지갑을 돌려준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한 장의 종이를 꺼낸다. 종이 뒷면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얼마 전에 읽었던 김경호 앵커의 <한 번에 되지 않는 사람>에 나온 한 이야기 '5,000원이 필요한 사람'을 보다가 오래된 기억 속에서 떠올랐었다. 책의 내용은 이렇다. 급하게 택시를 잡고 도착하고 나서야 지갑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친구에게 택시 기사는 "그 돈 안 받을 테니까, 대신 꼭 좋은 일에 쓰세요." 하고 그냥 갔다. 그 후 그 친구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민하던 중 마주친 폐지를 줍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5,000원을 드렸고 이후로도 매일 아침 5,000원짜리 지폐를 챙겨 집을 나선다고 한다. 프로젝트의 현실 판이다.


두 번째는 내가 좋아하는 SNS 어라운드를 통해 시작된 '달콤 창고'. 해외의 'Suspended Coffee'와도 비슷한 느낌인데, 이 달콤한 창고의 시작은 익명의 누군가가 강남역 사물함에 초콜릿을 채워두고 비밀번호를 공유하면서부터다. 

달콤창고의 시작이 된 SNS 글

이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가 여러 곳에서 달콤 창고가 운영되기도 했다. 단순 나눔을 넘어서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을 통해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고들 표현한다. 한 때는 나도 이전 회사에서 만들어두고 운영하기도 했었다.(물론 채우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생각해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런 이야기들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이유는 서로의 신뢰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베풂과 선행이 듣는 것과는 다르게 정작 실천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삭막한 세상에서 누군가를 이유 없이 먼저 신뢰하기란 생각보다 힘든 일이고 100중 하나만 나쁜 마음을 먹어도 그 흐름은 이어질 수가 없다. 그렇기에 그 신뢰라는 것을 얻는 것도 갖는 것도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한 예로 달콤 창고도 누군가 사물함을 여러 번 털어가는 바람에 결국 개수가 현격히 줄어들기도 했다.(심지어 사비로 운영하던 지하철 보관함의 보증금까지 받아 갔다니...)


당근 마켓은 잘 되고 있는 듯 하지만 부작용도 가끔 나오는 듯하고, Better World는 프로젝트가 종료가 되었다. 달콤 창고는 아직까지 운영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대가 없이 좋은 것들은 지속되기가 어려운 것 같다는 안타까운 생각도 들긴 하지만, 그저 욕심 없이 바라보자면 사라지지만 말고 우리 주변의 어디선가는 그 따뜻함이 계속해서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간 그 따뜻함이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한 번씩은 스쳐가는 기분 좋은 행운으로 다가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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