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58일차] 파친코, 영원한 이방인의 삶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든 삶의 굴레 속에서 고통받고 있지는 않나

by NUL BOM

어쩌면, 어쩌면 이 글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적어도 한 11개월 간은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어려울 것 같다. 평소 전화를 먼저 주시는 일이 거의 없는 시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안 그래도 남편을 통해 오늘이 시아버님의 음력 생일이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는데 남편이 퇴근하면 함께 전화로 축하드려야지 했는데 남편이 벌써 퇴근한 줄 알았던 어머니는 전화가 오지 않는 아들 내외가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하여 내게 연락을 직접 하신 거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안부치레 "쉬니깐 좋니?"라고 물으셨다. 쉬는 동안 또 나름의 일과를 만들어 온전히 쉰 것 같다란 느낌은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아직 온전히 쉰 것 같다란 느낌을 받기에는 너무도 젊다. 그리고 이루어 놓은 것도, 여유 있게 벌어 놓은 것도 없다. 오히려 이 기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쉬었더라면 지금쯤 지나간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

거의 60일이 다 되어가는 백수 생활 동안 올해 지난 9개월간 읽은 책의 절반을 읽었다. 정말 드문드문 글을 올리던 브런치에도 그간 올린 게시물의 두 배의 게시물을 올렸다. 일찍 잠들고 일어나려는 규칙적인 생활 패턴 만들기에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하루 2-30분은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평온해지는 소중한 시간을 마주하고 있다. 내년도 공부를 시작하면서는 절대절대 못할 일이지만 배달, 외식 최소화를 실현하려 날마다 열심히 이것저것 식사를 차렸다. 퇴직금을 IRP 계좌로 받아보고 나서야 CMA, ISA, 연금저축, IRP 계좌를 통해 투자하는 방법을 공부하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전 집에 있을 때는 집 한 구석을 차지만 하고 있었던 전자 피아노도 종종 치면서 이 전에 쳤던 적이 있는 곡 3개를 다시금 꽤 칠 수 있게 되었다. 아파트 커뮤니티 시설로 피트니스센터, 사우나, 카페, 도서관도 종종 이용하며 집순이 생활에 적절한 환기 시간을 마련해주고 있다. 앞으로를 위한 준비로 이곳 근처의 난임병원도 새로 알아보고 다시금 검사를 받아봤으며, 내년도에 들을 인강, 공부법 등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이러쿵저러쿵 나열을 하긴 했지만 결론은 마냥 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아니,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정말 잘 쉬고 있다고 봐야 할까?


최근에 파친코 1, 2를 읽었다. 이 책이 나온 지도 어언 6년, 드라마로도 유명했던지라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는 이 책을 나는 이제야 접했다. 뭔가 내용이 답답하고 어두울 것만 같아 피했던 것이 사실이다. 책을 읽기에 앞서 작가소개란을 읽고는 이 책의 작가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고 놀랐다. 10살도 안 된 나이에 한국을 떠나 미국 뉴욕으로 이민 간 그녀는 심지어 한국어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재일교포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역사학과 대학시절 일본에서 온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이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뒤였다. 그녀는 일본계 미국인인 남편을 따라 약 4년간 일본에서 생활을 했고 한국 핏줄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 차별을 당했다고 한다. 이때 그녀는 본격적으로 재일교포와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엄청난 수의 인터뷰를 진행, 그들의 이야기를 다룬 파친코를 발표했다.

파친코는 1910년부터 1989년 한국 근대사를 바탕으로 재일교포들의 4대에 걸친 삶의 애환을 다룬다. 재일교포들의 슬픈 디아스포라를 다룸으로써 이들이 어떠한 어려움을 겪었고 어떻게 차별을 받았으며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가를 알려준다. 재일교포들은 고국을 떠나 있었기에 해방과 조국분단, 한국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았다. 대신 미국의 폭격을 받고 일본의 패전을 경험했으며 남북 정치 이데올로기가 이들에게도 전해져 민단과 조련으로 분열된다. 조국에서도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던 이들은 일본에서도 심지어 이곳에서 나고 자랐을지언정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굴레 속에서 유일하게 돈과 권력과 신분 상승을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파친코 사업이었다. 야쿠자와의 연관성 때문에 폭력적 이미지가 강했고 좋은 인상을 받을 순 없었지만 이것이 최선이었던 것이다. 파친코가 운명을 알 수 없는 도박이듯 재일교포들의 삶도 이 파친코와 다를 바 없었다.

나라의 흉을 보면서 '세상 참 거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서 이 고생을 하지' 싶다가도 온전히 주권을 행세하면서 보호받을 수 있으며 살아갈 수 있는 국가가 내게 존재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상대적으로 그러지 못한 동시대의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곤 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놓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파친코. 파친코에서는 아무리 어려운 시기에 문제가 많은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도 희망이 존재하고 극복할 수 있음을 전달하고자 한다. 시대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시작된 이민자의 삶, 어디서도 환영받을 수 없는 이방인의 삶.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은 차별뿐인 삶의 굴레 가운데 4대째에 이르는 주인공, 솔로몬은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고 결국은 희망이 있을 거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 아버지의 파친코 사업을 이어받으려 한다.

가끔씩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가 정해 놓은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막연한 암담함.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한 번쯤은 느껴보았을 거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수긍하고 내가 그래도 열심히 버텨냈음을 인정해 주고 나의 가치관과 신념을 돌아보며 지금 기울이고 있는 노력이 이와 상통하는 지를 살핀 뒤, 만약 일치하다면 언젠가 빛이 찾아오리란 마음으로 힘을 내야 한다. 계속해서 그 한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도 나는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옳은 일을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떳떳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백수 56일차] 박곰희TV에서 내 인생 직업적목표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