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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널하우스 Nov 02. 2024

당신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습니까?


당신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습니까? 최근에 마주하게 된 질문이다. '생각합니까?'를 자의적으로 '믿습니까?'라고 바꿔 묻게 된 까닭은 물음이 논리적으로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화에 대한 논의는 이미 2500년 전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해 정리된 적이 있다. 그는 만물은 유전한다고 말했다. 판타 레이(panta rhei). 쉼 없이 흐르는 강물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그러므로 동일한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글 순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이 만고 불변의 법칙은, 잠깐 '불변'이 들어갔다. 다시, 이 만물 '유전'의 법칙은 내가 보기에 고대 그리스에서 보다 요즘 시대에 더 잘 먹힐 것 같다. 글로벌화, 디지털 혁명, 인공지능—이 모든 것은 이제 변화가 일상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일깨우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란 무엇일까. 앞서 만고 '유전'의 법칙에서 보여지듯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그 사실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자기모순적인 진리일까.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그 사실마저도 변화한다는 동어반복적인 진실일까. 내가 느끼기에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란 사람에게는 '세상을 간단하게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만물이 어떠한 물리법칙 하나에 묶인다면, 신이나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발견한 우리는 아마도 세상을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욕망이 고대에서는 원자설과 같은 세상을 설명하는 원리에서, 중세 기독교시대에서는 신에게서, 현대에는 과학주의와 반지성주의에서 찾아볼 수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해 본다. 


'모든'이라는 것을 입에 담는 순간 필연이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확집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생각이 강해지면 모든 것은 변해야만 한다라는 확집으로 도약한다. 이는 오히려 사고를 개방시키기보다 정지시키는 주술적인 작용을 하게 되는데 단순히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쯤 있지 않을까라는 느슨한 생각을 가지는 것 마저도 죄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가장 역동적인 발상이 오히려 가장 폐쇄적인 사고로 작동되고 마는 것이다. 자기모순은 '살아간다'라는 말이 '죽어간다'의 다른 말인 것처럼, 자기실현과 자기 소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간의 유한성을 통감하게 만든다. 


동어반복은 “자유란 자유로운 상태이다”와 같은 순환적 정의로 더 이상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의미에 대한 피로감만 줄 뿐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 자기모순과 동어반복은 진리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한계란 '세상은 간단히 이해할 수 없음'이라는 한계이다. 진리적인 명제가 자신의 한계를 우상과 염원으로 바꿔 줄곧 숨겨놓기 바쁜 때, 자기모순은 전혀 반대되고 상충되는 것들의 '양가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동어반복은 물음의 본령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도달하게 되고 마는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을 고스란히 꺼내 보인다.


아나톨 프랑스는(이하 아나톨)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기적은 유치한 개념이라 인간의 지성이 자연에서 벌어지는 일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더는 유지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번개가 치면 하늘이 분개했다고 놀라는 사람들은 이제 바보들 뿐이다. 번개는 구름과 구름, 구름과 대지 사이의 방전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적을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로 정의'한다. 


하지만 자연의 모든 법칙을 알 수는 없. '기적이라는 말의 정의 자체가 알기 어렵고 알 수 도 없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어떤 현상이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과학주의적 접근의 자기모순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지를 통해 모든 기적을 부정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게 아닌가. 알 수 없는 것을 알지 않으려 하는 무지의 부정은 반지성주의적 동어반복일 것이다. 아나톨이 지적한 자기모순과 동어반복을 애써 무시하며, 우리는 이미 이해하고 아는 것들은 자연스러우며 간단하다는 태도를 견지한다. 이러한 이해의 방식은 인간이 현실을 대하는 태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아나톨은 같은 책에서 '혁명을 일으켜본 자들은 후대가 혁명에 나서고 싶어 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고도 말했다. 자신이 주도하지 못하는 삶이 계속해서 잘 굴러가는 현실에서 '시인이든 상원의원이든, 구두 고치는 사람이든 자신이 세상의 결정적인 목적이 되지 못함을, 우주 최고의 이성을 갖춘 이가 아님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라는 것이다. 인간이 품지 못하는 거대한 것 혹은 미지의 것도 있을 것이다. 아니 많을 것이다. 


아나톨의 말대로라면 그곳에 바로 기적과 혁명, 진리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자연스러우면서도 간단하고 당연한 진실을 인간은 가장 곤란해한다. 감축하여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욕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포용할 수 있는 크기로 감축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존재는 너무도 보잘 것 없어지지 않는가. 여기서 또 외부의 것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포용이라는 말은 모순을 일으키고 말지만. 만약 진리를 인간이 알 수 있다면 과연 진리라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욕망은 진리마저도 감축하여 이해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누군가는 말했다. '아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해야만 한다고. '아는 것'만 이야기한다면 아는 것 이상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무언가를 더 '알려고'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이 글을 처음부터 쭉 읽어보니 나도 도통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 스스로가 무언가를 '알려고' 쓰는 일은 고된 작업임을 체감할 뿐이다. 이미 2500년 전에 미리 의견을 제출하고 수정도 못하시는 분께 가타부타 이야기를 한다는 게 참 공정하지 못하다 싶기도 하지만 만물 유전 사상에 대한 본질이 감축될까 우려하는 필자의 염려를 공감해 주실 거라 감히 짐작해 본다. 


난감한 질문 때문에 변화의 가장 고전적인 질문부터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비록 옆길로 많이 돌아왔지만, 함께 방황하는 인간으로서 이해주길 바란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당신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습니까? 여전히 피하고 싶은 질문이다. 감축되어 이해될 테니 말이다. 그래서 여지는 남겨두려 한다. 철저한 자기모순과 동어반복으로 말이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미지의 불변을 나는 믿고 싶습니다. 내 안에 내가 모르는 기적과 같은 불변이 존재할지도 모르니까요. 모든 가변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모든 기적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내 안의 불변하는 가변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만약 내게 찾아온다면 나는 이해하기보다 우선 놀라고 싶습니다. 네?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간단히 이해할 수 없었다면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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