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을 '게임' 정도로 만족했으면 한다. 1등을 하고, 압도적인 성공을 이루고 하는 것들을 일종의 '게임' 정도로만 치부(?)했으면 한다. 라스트 보스 레이드를 뛰다가도 '로그아웃' 이후에는 빨래를 넌다던가, 저녁밥을 차린다던가 하며 태연히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준칙이 허용되는 선에서 경쟁했으면 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경쟁'이 '게임'만큼 객관적 절도(節度)에 대해 철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생활 자체가 게임으로 인해 피폐해져 버린다면, '질병'으로 간주되어 '치료'의 대상이 된다. '일상의 회복'을 위해 병원에 가야만 하는 신세라는 것이다. 하지만 경쟁에서 만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가 전제조건이라 싶을 만큼, 가혹할 때가 있다.
입시 경쟁률, 청년 실업률, 정신건강실태조사와 같은 자료들을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과도한 경쟁'에 대한 문제인식들은 누구나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긴 문제야라며 한마디 거들긴 하지만 생활에서 나타나는 과도한 경쟁의 경향들에는 정작 무감할 때가 있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가 좋으면 그만이지. 인성은 좀 글러도 잘하면 장떙아냐? 급기야 촌철살인의 논리로 추앙받기에 이른다.
경쟁이라는 시스템이 스스로를 합리화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이것은 심각한 구조적 문제인 것이다. 간단한 이데올로기는 손쉽게 세상을 분절하고 이해시킨다. 사람들을 '승리자' 혹은 '패배자'로 나눈다. 승자는 모든 것을 얻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러한 강박적인 단순 명료함을 중독이라 부르는 것일까, 마치 도박처럼 단순한 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시스템에 순응해 '참여'하는 것뿐이다.
태곳적 '경쟁'이라 함은 본래 두 사람이 자웅을 겨뤄보고, 한 수 배우기도 하며, 서로가 힘을 키워가는 '상호성숙모델'에 기반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이상적이지만 곤란한 모델'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도 그 개념이 남아있을 리 없을 테니 말이다. 악착같이 한쪽만 수혜를 보는 모델이었다면, '공생'은 성립불가다. 한 세대를 거쳐가기도 전에 '전쟁 같은 경쟁'으로 이미 인류는 멸종해 버렸을 것이다. 상호성숙모델에서의 경쟁은 언제나 타자적이다. 타자가 없다면 경쟁은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의 경쟁에서 보이는 모습들은 서로의 힘을 깎아내리는 모델로 퇴행하는 것만 같다. '상호퇴행모델'로 이름을 붙인다면 너무 과격할까. 서로의 힘을 최적까지 끌어올려 자웅을 겨루는 '고귀한 경쟁' 보다는,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고 약체화시키는 일이 훨씬 수고를 덜어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건 단적으로 말해 병리적이다. 경쟁을 통해 타자는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공동체 전체의 수명을 깎는 일이기도 하다.
자사의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는 비용보다, 타사의 혁신적인 제품을 가로채는 게 '싸게 먹힌다'면 정말이지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전교 1등을 하기 위해 경쟁자를 '옥상에서 밀어버렸다' 하는 이야기는, 슬프지만 얼마든지 익숙한 서사가 되어버렸다. 그러한 '질병'이 퍼질수록 사회는 후퇴해 갈 것이 명료하다. '치료'의 필요성을 일상의 여러 등지에서 소리치고는 있지만, 일상이 '게임의 판돈'에 불과한 곳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리얼리즘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가상의 것이 되고 만다.
경쟁은 구조적 문제라 했다. 노력조차 할 수 없는 여건인 자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 주어진 선택지를 떠밀리듯 택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떠밀리듯 택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에는 냉혹한 경쟁도 포함될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4-5년 전 k-mooc(온라인 공개강좌 플랫폼)에서 수강생 동기들과 토론한 적이 있다. 각자 주제에 대한 내용을 서술하고 다른 사람이 서술한 내용에 대해 댓글로 토론을 하는 형식이었는데 토론주제는 "니체는 행복을 ‘저항을 극복하고 자신의 힘이 증가되는 것을 느끼는 것’이라고 보면서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말세인을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였다. 한 동기 분께서 니체의 '고귀한 경쟁'이 갖는 이상주의적인 부분을 현실적인 관점에 기인해 지적하였고 다음은 그 부분을 요약하며 당시 필자의 생각을 작성한 내용(댓글)의 일부이다.
"사회 구조로 인해 노력했음에도 실패하거나, 당장 생계를 유지하기에 급급해 삶을 바꿔놓으려는 노력조차 할 수 없는 여건인 자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 주어진 삶에 만족하는 선택지를 떠밀리듯 택할 수밖에 없다."
***님의 의견에 일부 공감합니다. 니체의 말세인에 대해서 그들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배경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으며, 경제적 양극화, 생계의 유지와 같은 현실적인 고려요소들 역시 외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저항을 극복하고 자신의 힘이 증가되는 것을 느끼는 것'을 행복이라 정의할 수 있다면, '저항의 극복'과 '힘이 증가되는 것'이 '계층 이동'이나 '사회적 성공'으로만 치환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초인'과 '말세인'에 대한 구별이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따른 계량화로만 환원되는 것에 대해서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계층 이동'이나 '사회적 성공'을 개인의 노력을 수치화하기 위한 결과론적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니체가 말하는 행복의 의미를 축소 재생산한 것은 아닐까 우려됩니다. 시련은 각 개인에 따라 당연히 달라질 것이며, 그에 대한 극복 역시 모두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휴일에 1시간 일찍 일어나 독서를 한다거나, 주 3회 달리기를 한다거나, 하루에 한 번 다른 사람을 칭찬한다거나 주어진 관성을 벗어나고 스스로에게 작은 규칙 하나라도 입법하는 행위 역시 니체의 행복론에 해당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거대한 시련에 대한 위대한 극복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조교님께 댓글로 칭찬받았던 기억이 난다.(송구스럽고 감사합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부끄럽다. 당시 필자는 니체가 바리새인의 안락함을 비판한 주된 이유를 자신의 상아탑을 더 높게 쌓지 않아서가 아니라 높고 굳건한 상아탑을 도무지 무너뜨려볼 용기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키에르케고르는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이 종교적 신심, 내면적 도덕은 무시하고 율법과 교리를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에만 가치를 둔다며 비판했다.
니체 역시 안락함, 타성에 젖은 삶을 보며 높은 상아탑을 맹목적으로 따르며 그저 유한한 필멸의 존재로만 환원되려는 모습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이다. 종교의 순기능은 삶에 대한 경외심과 신비로움을 느끼게 해 주며, 그를 토대로 자신의 작은 모래성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고 나아가는 힘을 주는 것일 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신성한 기적을 부정하는 것은 신을 살해한 니체가 아니라 오히려 신을 누구보다 믿으면서도 안락함에 젖어 있는 말세인이었기 때문에 니체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필자는 생각했었던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경쟁의 냉혹함은 생계유지나 급급한 삶에 의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필요악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이면에 '계층 이동'이나 '사회적 성공'만을 정당한 목표로 삼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찬미와 신봉이 은밀하게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수치적 계량화에 의해 결국 삶에 대해서 가져야 할 이상이나 행복의 의미를 축소 재생산하며 구조적 문제에 대한 해결의 의지조차 꺾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 말을 조금 비정하게 해 보자면 생계유지나 급급한 삶이라는 침범불가의 이유로 경쟁의 냉혹함을 합리화하는 그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떠한 비판도 없이 정당성을 보장받는 안락함을 누리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다. '경쟁의 피해자'라는 어법은 애석하게도 그 누구보다 경쟁에 가담하는 어법일 수밖에 없다. 그런 식이라면 수치미달자는 모두 패배자이며 불행해야만 할 테니까. 그러한 파국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경쟁에서 비윤리적인 수단과 방법까지도 합리화되고 말 테니까. 그렇다면 굉장히 안락한 논리가 아닌가라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게임은 다시 '로그인'할 수 있다. 언제든 새로운 캐릭터와 서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 '로그아웃' 후에 돌아갈 수 있는 '일상'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나는 '경쟁'을 '게임' 정도로 만족했으면 한다. 경쟁의 어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로그아웃' 이후에는 빨래를 넌다던가, 저녁밥을 차린다던가 하며 태연히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 '경쟁'이라는 게임에 접속했더라도 되돌아갈 일상이 없다면 게임의 시스템 안에 스스로를 떠밀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도저히 만족할 수 없겠다면, 내가 아는 한 '일상의 전부'를 걸어봐도 좋을만한 게임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누군가의 일상이 되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게임만큼은 제로섬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