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과 어울림
6월의 어느 저녁, 연기를 하는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을 하나 꼽자면, 바로 '타자 감수성'이 아니겠느냐고. '자아정체성'이 확고해지는 것 보다야 '타자감수성'이 풍부해져야 하는 게 아니겠느냐고. 어쩌다 보니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됐다.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정의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나를 고정하고 규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디쯤엔가 고정된 내가 있고 그러한 나에게 맞춰가는 작법을 통한다. '나를 어긋남 없이 딱 맞춰버렸다'면 이제 충실하게 '나를 연기'하기만 하면 된다. 투명하게 떠오른 '나다움'을 이제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만약 '내가 정의한 나'가 나의 정체성을 대변할 수 있을까 묻는다면, 나로서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을 것만 같다. 나라는 걸 그렇게 빈약하게만 정의해서야 되겠는가 싶은 것이다.
자존감이나 자신감이 자아정체성의 강도에 비례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런 건 차라리 감수성의 영역이 아닌가 싶다. 나를 벗어난 지평에 자존감이나 자신감을 부딪힐 어떠한 기회도 존재할 수 없다면, 그런 것들이 있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재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뛰어난 품질의 자아정체성을 보유하기보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신이 가능한 풍부한 타자감수성의 역량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닐까. 연기라는 것도 배역의 진정한 특성을 찾아 내 것으로 만드는 행위에(자아화)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배역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타자화)에 전율을 느끼지 않던가.
물아일체의 경지라는 것도 대상에 대한 정확한 정체성의 합일을 이르는 건 아닐 것이다. 일심동체 그런 거 솔직히 환상이라는 거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끊임없이 대상을 향해 방심하지 않고 긴장해야 하며 유연한 감수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몰입을 주지 시키는 언명일 뿐이라는 것이다.
성숙은 단순히 신체의 발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역할의 변화까지도 포함한다. 엄마 손을 꼭 잡고도 잠 못 들던 꼬마아이가 어느덧 명절에 부모님을 찾아와 용돈을 쥐어 드릴만큼 훌쩍 커버리듯이. 그런 일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고정된 나'가 필요하기보다 '내가 아닌 나' 혹은 '내가 아니었던 나'들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아닌 나', '내가 아니었던 나'는 '보다 강화된 나'가 아니라 '타자'다.
나라는 타자들의 집적이 나의 아이덴티티가 된다. 만남과 어울림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숙명인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울림에 빛을 발하는 타자감수성이야말로 재능이라던가 능력의 정수처럼 느껴지고 마는 것이다. 어울리거나 어울리지 않을 수 있는 조화의 문제인 것이지, 더 이상 나이거나 내가 아니 거나하는 분열의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고맙게도 친구는 이러한 몽상적인 이야기에 깊이 공감해 줄 만큼 타자감수성이 풍부했다. 그는 내가 보기에 연기를 정말 잘한다.
언젠가 '모리스 블랑쇼'라는 제목으로 발췌해 둔 메모가 있다. 출처를 정확히 모르겠으나, 이야기와 '어울리는' 것 같아 옮겨 둔다.
“왜 단지 말하는 이 한 명으로는, 단지 하나의 말로는 결코 중간적인 것을 가리킬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을 가리키기 위해서는 두 명이 필요한 것일까?"
"맞아 우리는 두 명 있어야 해"
"왜 두 명일까? 왜 똑같은 하나를 말하기 위해서는 두 명의 인간이 필요한 것일까?"
"그것은 똑같은 하나의 것을 말하는 인간은 늘 타자이기 때문이지."
똑같은 하나를 말하기 위해서는 두 명의 인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똑같은 하나를 말하는 사람이 늘 타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