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은 <'열정적 애착'으로부터 탈-동일화로>라는 그의 텍스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정한 행위에서 최상의 자유는 궁극적인 수동성과 동시 발생한다는 데 있다. 그 몸짓을 맹목적으로 수행하는 생명 없는 자동체로의 환원이다.'
로맨틱 코미디로 분석해 보건대, 사랑에 빠진 남녀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내가 왜 이러지?'라거나 '내가 미쳤지..' 하며 마치 자신을 타자처럼 낯설게 인식하곤 한다. '타자 같은 나'를 처음엔 부정하지만(입덕부정기), 결국은 받아들이며 해피해진다.(입덕긍정기) 이 진부한 클리셰야말로 '최상의 자유'에 대한 가장 적합한 묘사가 아닐까 싶다.
사랑의 전개양상은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기보다 그저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에 가깝지 않던가. 사랑이란 본디 갖은 방법으로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던 애틋한 마음이 외압이라던가, 장애물이라 이름 붙여진 벽들을 끝내는 돌파하는 극한의 수동적인 행위인 것이다. 사랑의 정확한 서술어란 '그저 일어난 것'.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빠르게 전염되는 것 아니겠는가.
히어로물의 전개도 비슷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강대한 악을 물리친다'거나, '최강의 빌런을 쓰러뜨린다'는 이야기 구조는 분명히 매력적일 수 있지만, 단지 '흔들리는 눈동자'나 '떠는 손'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는 수동적인 저항이 더 진지하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히어로물은 단순한 신화적 영웅담을 넘어서, 하나의 진정성 있는 이야기로 읽히게 된다.
동일화를 벗어난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내 안에서 일어나 버린다는 것이다. 아득히 자신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애착이라 부를 수도 없다. 차라리 해방에 가까운 것이다. '궁극적인 수동성'은 다시 말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이가 어쩔 수 없이 행하는 몸짓인 것이다. 최상의 자유란 게 그런 맥 빠지는 소리에 불과한가 싶겠지만,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을 나는 아직 찾지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