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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널하우스 Nov 28. 2024

너의 이름을 부르면


선생님이 출석부를 읊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성숙할 때가 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고유명을 가진 타인이 곁에 존재함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배움의 전당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된다. 


누구는 몸살로 결석이고, 누구는 전학을 가고.. 개인사를 공공연하게 알리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옆의 누군가와 어떠한 개인적인 정보도 공유하지 못한 채 생활한다는 것 또한 분명 슬픈 일이다.


한 무리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당신을 부를 때, 비로소 당신은 나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호명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주술적인 행위인 것이다. 누군가를 부른다는 것은 '당신은 여기에 있어주셔야만 합니다'라는 간곡한 부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벽한 타인을 고유명으로 호명할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공적 영역은 텅 비어 가고, 그곳을 드나드는 이들은 점점 익명화되고 있다. 타인의 얼굴은 하나의 아이콘으로, 말없이 스크롤되는 식상한 타이틀로 변해가는 중이다. 


불과 두 달 전, 미국 대형은행 웰스파고에서 근무하던 60대 여성 직원이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 사망한 지 나흘 만에 발견되었다. 주말이 끼어 있었던 탓도 있지만, 금요일과 월요일 동안 아무도 그녀의 부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직원들은 어딘가에서 악취가 난다고 불평했지만, 단순히 배관 문제로 치부하고 지나쳤다. 그저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일상 속에서, 그녀는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세 가지의 삶을 산다고 한다. 공적인 삶, 개인적인 삶, 그리고 비밀스러운 삶. 그러나 세 가지 삶의 균형은 기울고 있는 듯하다. 개인적인 영역은 더 이상 은밀함에 만족하지 않고, 비밀스러워졌다. 


비밀을 간직할 공간이 부족해지면서, 공적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공적 영역은 착실히 야위어 가고, 사적 영역만 한없이 살찌고 있다. 이제 우리는 회사에서 이름조차 부를 필요가 없을 만큼 서로가 비밀스럽기를 바란다.


한 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더 이상 풍성한 마을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지 않는다. 마을에서는 누구도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른들 또한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유명을 수호하고 책임지며 사는 것이 어려워져 가고 있다. 이름조차 지키지 못하는 삶이란 얼마나 참담한 삶인가. 그러니 부디 서로의 이름을 더 자주 불러주자. 나 역시 누구도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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