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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기반 인간관계

by 널하우스


얼마 전 동생과 술 한잔을 했다. 오랜만에 들린 집 근처 닭꼬치집. 사장님은 얼굴을 기억하시고는 어묵탕을 서비스로 주셨다. 거의 반년만 인데, 종종 찾아뵈어야겠다.(감사합니다. 사장님.) 동생은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소주 한 병을 금세 해치웠다. (나는 운동 후 근손실 방지를(?) 위해 피치 하이볼 한 잔으로 목만 축였다.)


동생은 점포를 하나 관리하고 있다. 안주와 주류를 취급하는 업장에서 관리해야 할 직원들이 많다. 직원들이 많다는 것은 곧 어려움이 많다는 것. 형 동생하는 종업원들과의 관계에서 느낀 회한을 나에게 하나씩 풀고자 찾아온 것이었다. 참고로 나는 일개 회사원이다.(?) 그렇다. 잘못 찾아온 것이다.


핵심은 직원들의 편의를 봐줘도 끝이 없다는 것. 지각, 근무불량, 자신을 향한 험담 등등 여러 면에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상대를 나무라든 술을 마시든 화를 내든 여러 우회로를 경유하겠지만 그런 문제는 우선 '기운을 차리는 것' 말고는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기운을 차리기 위해서는 겪은 일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져야 하는데, 가장 효율적이고 품이 적게 드는 것은 그 일을 스스로에게 객관적으로 설명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의 '룰'을 상기해 보는 것이다.


9시 출근 하나만 놓고도 경영자와 근로자는 갑론을박한다. 안건에 대한 생각들은 사람의 머릿수만큼 달라지기 마련이다. '법'이란 게 엄연히 존재하긴 하지만, 어떻게 만사를 법대로만 하겠는가. 세상사 딱 잘라 놓기 애매한 것들이 태반이다. 그렇다면 '룰(Rule)'은 필요 없는 것일까? 아니, 그래서 더 필요하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은 고용관계가 원칙적으로 '계약 기반'임을 명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계약 기반임을 명시하는 이유는 최고의 효율을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이를테면 '아무런 이유 없이 출근을 하지 않으면 안 돼요'라던가 '업무 외 과도한 지시를 내려 서로 곤란하게 만들지 맙시다'라는 말이다.


고로 규칙은 단순하고 적을수록 좋긴 하지만, 자꾸만 백도어(뒷문)를 공략하는 해커들 때문에 보충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한계는 있어 완벽하게 공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부분을 명문화하여 룰로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혹여 그게 가능하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하나도 득이 되지 않는다. 정신건강만 나빠질 따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룰은 필요하다. 비교적 허들이 낮으면 좋다. 그게 나의 생각이다. 간혹 베풂에 대해 보답이 돌아오지 않을 때 실망을 하게 되기도 하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한 아픔은 병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베풂과 믿음은 룰의 영역이 아니다.(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베풀면 돌아올 때가 많다. 상대가 나에게 호감을 가질 것이라는 믿음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단적으로 말해 그러한 따뜻한 마음들은 룰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다.(그래서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나와 같은 마음이겠거니 하는 공감의 과잉을 단속하기 위해 룰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서로의 이치가 달라 다투게 될 때, 최소한의 피해로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말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였나. 동생은 아무리 친하게 지내고 잘해준다 한들 직원들은 자신을 절대로 같은 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걸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직원이었다면 친밀함이나 공감으로 넘겨도 되었을 사소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말했지만, 계약은 공감의 과잉을 단속해 주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이심전심, 교외별전이면 금상첨화지만 동상이몽에 구밀복검까지 가버릴지 누가 알겠는가. 냉정하게 말해, 후자의 확률이 더 높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정말 칼을 품는 적개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들 간의 기본적인 스탠스는 동상이몽이기 때문에 소통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자신의 상황과 입장, 경험들을 일일이 언어화하고 술어화해 보는 연습은 중요하다. 스스로에게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일은 타인에게도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설명에 상대가 납득한다면 '동상일몽'까지는 아니더라도 '룰'로서 가치를 지니게 되며 계약이 가능해진다. 계약은 철저한 이해의 산물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담보이기도 한 것이다.


오래 일한 직원들과 살갑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좋지만, 고용관계에 뒤따르는 기본적인 사항들 역시 준수되어야만 한다. 필자에겐 동생의 스트레스가 그 사이의 균형이 깨지며 맞닥뜨린 문제들처럼 여겨졌다. 균형을 맞추는 일은 오롯이 동생의 몫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사람은 성숙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뻔한 말처럼 들려 미안하지만, 설명이라는 것은 '낯선 일'을 '뻔한 일'로 치환해 보는 시도가 아니겠는가.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인류는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초의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무제한적 자유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에, 모두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한하는 것으로 공생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계약은 철저한 구속력을 지니는 것 보다도 너와 나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계약 기반이라는 말이 그리 차갑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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