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 맞은편에서 걸어오시던 아주머니가 별안간 인사를 건네셨다. 알고 보니 퇴근 후 종종 찾던 치킨집 사장님이셨다. 길목에서 나의 시야에 담긴 사람은 오직 그분 한 명뿐이었지만, 나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사실 그녀를 못 알아봤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만약 그쪽에서 먼저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어깨가 부딪힐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조차 나는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인사에 응답하며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기억은 파도처럼 밀려와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해 갔다. 구축된 이미지와 시신경의 신호가 일치를 이루며, 상대가 비로소 '존재함'을 나는 실감했다. 이 모든 과정은 뜻밖의 혁명처럼 느껴졌다. 마치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을 지근거리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얼굴을 알아본다는 경험을 대체할 말이 있다면, 그것은 '탄생'이 아닐까.
'알아본다'에 대한 해석을 단순히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문장에 고정시키는 것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나는 그 정의를 다소간 유예해보려 한다. 예전에 있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상기하는 것만으로는 내가 느꼈던 '존재함'에 대한 실감을 여실히 체감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스치는 사람이 나의 기억 저편에서 고유한 얼굴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각하지 못할 때, 그 사람의 존재를 실감하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분명 나의 앞에서 다가오고 있지만, 익명 속에서 유명으로 전환되는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그 사람의 고유성을 나는 식별하지 못한다.
그것은 나의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도, 눈으로 바라보는 이미지의 형상에 의존하기 때문에도 아니다. 상대는 항상 지금 이곳에서 탄생하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알아봄으로써 나의 모든 신경은 상대의 해석에 돌입한다. 얼마 안 가 낯섦이 익숙함으로 변모되지만, 첫 대면의 순간은 항상 어디에도 없던 것이 갑자기, 아무런 예고 없이 불현듯 나타난 것처럼 나의 '존재함'을 송두리째 흔든다.
'미지의 세계'가 내가 아는 '기지의 세계'로 환원되는 낙차에서 가장 정확한 감정은 놀라움일 것이다. 놀라는 것은 기지의 세계에 대한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표현이자 미지의 세계를 긍정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의 내부 세계를 뚫고 들어오는 외부의 세계는 위험천만하며 또한 강렬하지만, 우선은 놀랍다. 그래서 오늘 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본다는 것도 내겐 놀라웠다. 마치 빅뱅이 발생한 현장을 목격하듯이, 새로운 이치를 발견하듯이, 아기가 태어나듯이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