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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한 레비나스 독해

by 널하우스


레비나스를 읽으며 가장 충격적이었던 실감은 윤리는 균형적인 것이 아니라는 비상칭성에 대한 논의였다. 평등과 자유에 기원한 모던한 균형 의식은 도덕과 윤리를 다룰 때도 역시 합리적인 것이 아닌가, 보다 기원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나의 상식은 그의 텍스트를 처음 접한 순간 송두리째 깨져버렸다. 그즈음에서 나는 진실로 '어른'이 되고 싶다는 나의 욕망을 텍스트를 통해 처음 발견한 것 같다.


'배려'와 '친절'은 이미 기원보다 더 기원적으로 불균형을 전제로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윤리적 행위를 취사선택할 수 있음을 고지하고 자유의 선행을 주장하는 한 어떤 도덕과 윤리의 토대도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난문에 부딪혀 전제를 거꾸로 뒤집고 윤리를 우선한다. 그리고 윤리 위에서 철학적 토대를 재구축하기 위한 '지적 곡예'를 펼쳐나간다.


어떠한 전제를 선취적으로 설정하는 한 오류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합리주의적인 시각에 의해 찢기며 해체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레비나스는 윤리의 비상칭성을 우선 전제로 채택하는데, 그 전략은 탁월하다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의 텍스트에서 자주 마주칠 수 있는 '타자의 얼굴'이라던가, 먹는 것, 고아, 과부, 약자, 죽은 자, 외부세계와 신까지 일상의 구체적인 생활 세계에서부터 일반 철학이 추구하는 보편적 지평까지의 여정을 경유하며 펼쳐지는 그의 윤리적 주체에 대한 기술은 합리적 논의 이전에 '전-기원적으로' 신체에 먼저 스며든다.


그로 인해 비판을 하기 위한 사고 형성에 몰입할 때조차도 이미 레비나스적인 사고의 틀을 수용하여 사고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레비나스를 통해 레비나스를 비판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논의를 시작하는 주체의 자아에 대해서 그의 정체성부터 수정하지 않는 한 논의는 시작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를 형성하는 '앎의 구조' 자체를 비상칭성에 의해 주체적으로 구성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에게 한눈에 살펴지는 내부적인 앎의 네트워크는 이미 어둡고 무한한 외부세계의 지평에 비상칭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절대적으로 뒤처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구조는 윤리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외부세계와 나의 뒤처짐으로 인해 벌어진 '거리'는 이때 고스란히 '책임'으로 전환되는데, 원리적으로 세계 전체에 대한 이해와 나의 소박한 앎은 무한하게 벌어져 있기에 책임 역시 무한하게 증식하게 된다. 이때 '책임'이라는 어감이 주는 무거움으로 인해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을 테지만, 책임이라는 단어를 '차이'라던가 '다름'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좀 더 수월할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나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게 '책임'에 대한 시조이며, 이는 윤리에 대한 토대를 구성하게 된다.


거리가 무한하게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세계가 나와 같은 도량형으로 '측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 역시도 나와 같은 '도량형'을 공유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나의 앎은 원리적으로 비상칭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논의는 존재의 성립부터, 그에 대한 균형과 합리론을 해체한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반박을 위해 보다 전-기원적인 전제를 채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그러한 전 기원적인 전제를 숙고하는 방식 자체가 레비나스적 사고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게 만든다.



우치다 타츠루, <사랑의 현상학>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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