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뭐예요?” 그 질문을 들었을 때, 나는 조금 오래 머뭇거렸다. 머뭇거린다는 말이 감정을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할 수도 있다. “음…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겁니다.” 그 말이 너무 싱겁게 들렸던 것일까. 대화는 거기서 멈췄다.
여러 장면이 조용히 떠올랐다. 어스름한 저녁, 순댓국집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함께 바라보던 낯선 이들의 어깨. 분주한 점심시간, 계산과 상 치우기를 서로가 자연스레 돕던 분식집에서 카드리더기 작동법을 익히던 순간. 그리고, 이 따뜻한 음식들을 나누면서도 통장 잔고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던, 소박한 여유. (문득 깨닫는다. 왜 이토록 많은 장면이 음식과 연루되어 있는지. 점심을 막 끝낸 탓이겠지만, 그래도 결국 삶은 식사라는 형식으로 가장 자주 자신을 드러낸다.)
이 무탈한 일상이, 어쩌면 나에겐 가장 구체적인 ‘꿈’이라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그 꿈은 높지 않고, 멀지 않다. 그저 오늘 안에 다다를 수 있는 온도와 같은 무언가다. 얼마 전 만화방에서 들은 이야기 하나가 이 생각에 작은 파문을 더했다. 경찰이 두 번이나 출동한 날이었다.
하나는 격한 연인 간의 다툼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중년 남성의 절절한 울음 때문이었다. 둘 다 적잖은 소음을 남겼지만, 오래도록 내 마음을 침묵시킨 건 중년 남성의 비참한 울음이었다. 그는 말끔했단다.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보일 정도로 지적인 이미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렇지 못했다. “왜 모두가 나를 무시하는 거죠?”, “이틀 전엔… 자살을 생각했어요.”, “PC방 아니면, 여기밖에 머물 곳이 없어요.”
그를 향한 연민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어쩌면 비슷한 외로움을, 서로 다른 강도와 결로 겪고 있는 건 아닐까. 다만 나는 지금 어디쯤에 가도, 잠시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알고 있고, 내 안부를 궁금해할 사람 몇을 알고 있다.
내가 이 삶에 만족한다는 말은, 그저 운 좋게 얻은 몇 개의 버팀목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꿈이란 정말, 삶을 뒤흔드는 어떤 거대한 서사여야만 하는가. 아니다. 꿈이란 이런 나날들이 조용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 자체로도 충분히 존엄한 게 아닐까 한다.
꿈, 그것은 찬란한 목표가 아니라, 무력한 현재를 지탱하기 위해 불러오는 조작된 개념. 미래가 언젠가 회고해 줄지도 모를 어떤 의미를 지금 이 순간에 선취해, 삶을 납득시키는 장치이다. 설령 그 미래가 끝내 도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희망에 대한 희망’은 그렇게라도 작동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비루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마지막 남은 논리로서는 참 가냘플지도 모르지만, 희망에 대한 희망만이 내일을 '꿈꾸게' 만든다.
위로와 조언은 섣불리 할게 못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이미 알고 있는 질문을 다시 되묻는 일뿐이다. 그런 식으로라도 조심스레 상대의 옆에 서보는 것 밖에 달리 방법은 없다. 무력함만큼이라도 함께 통감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희망을 가지세요” 따위의 말은 할 수가 없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 그건 이미, 희망을 논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뜻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