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쓸 수 있는 것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그 말은 참 조심스러운 부탁이다.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건 결국 누군가의 시간을, 기억을, 때로는 상처를 요청하는 일이니까. 마치 책 한 권을 빌리듯이, 혹은 가만히 옆에 앉아 한 편의 삶을 구경하게 해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우리는 그런 부탁을 자주, 그리고 무심히 받는다.
언젠가 친구가 말했다. “너는 글을 쓰니까 좋겠다. 그때 그 얘기, 꼭 써봐.” 그날 밤, 내가 겪었던 일은 분명 내 이야기였지만, 동시에 그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의 말투, 침묵, 체념, 그리고 웃음까지—그 모든 것이 이야기의 결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쓴다’는 건, 결국 그 기억에 내 이름을 걸겠다는 뜻이 아닐까?
분식집에서 같이 순서를 기다리던 누군가의 무릎, 만화방에서 내 옆자리에 앉았던 낯선 얼굴, 길을 건너다 마주친 아이의 웃음. 이들은 모두 내 하루 속에 있었고, 내 감정을 움직였고, 어쩌면 내 문장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 과연, 나는 이들을 ‘쓸 수 있는가’? 이 삶의 저작권은, 누구의 것인가.
‘저작권’이라는 단어는 법률 교과서나 음반, 문서의 말미에만 붙어 다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훨씬 더 깊숙한 자리에서 우리를 조용히 붙잡고 있다. 내가 쓰는 삶은 온전히 ‘내 것’일까? 아니면 그 삶을 이루는 수많은 타인과의 접점 속에서만 존재하는 ‘공유된 무언가’일까?
국밥집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던 노인의 미묘한 한숨, 김치찌개 국물에 밥을 말아주던 아주머니의 손길. 이런 장면들은 누군가의 하루 속에서도 반복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창작하는가? 이미 존재하던 감정의 반복? 아니면 누군가의 아픔을 빌려서 나의 문장을 더 뜨겁게 만드는 일?
처음 ‘저작권’이라는 개념을 배웠을 때, 나는 그것이 ‘내 것을 지키기 위한 제도’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저작권은 어쩌면, 타인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경계선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깊이 기대며 살아가는지를 상기시키는 장치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누군가의 말을 빌려 쓰기보다는, 그 말이 나를 어떻게 흔들었는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누군가의 얼굴을 묘사하기보다는, 그 얼굴이 사라진 뒤에도 내 마음에 남은 잔상들을 기록하려 한다.
내가 가진 건 기억일 뿐이다. 하지만 그 기억마저 순전히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오늘 쓸 수 있는 건 결국, 함께했던 장면들을 최대한 정직하게 기억해내려는 태도뿐이다. 그 태도에서 시작된 문장만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감히 빌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