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오르막길
“눈앞에 아주 엄청난 보물이 있어도, 사람들은 절대로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네. 왜인 줄 아는가? 사람들이 보물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이지.” —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산티아고는 긴 여정을 떠난다. 그는 금보다 귀한 것을 찾아 나서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처음에는 알지 못한다. 다만 ‘표지’라는 낯설고도 내면적인 신호를 따라 걷는다. 나는 그를 수행자로 본다. 수행자는 무한 소실점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다. 그가 가는 길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그를 허무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목표에 ‘닿지 못할 자유’ 속에서 해방된다.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고, 도중에 멈춘다 해도 방향은 남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반드시 ‘이룸’이어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삶들이 무의미로 흘러가야 할까. 그 대신, 나아가는 자세, 걸어가는 궤적 자체가 의미가 될 수는 없을까.
지금, 우리는 너무 빠르게 도착해 버린 시대를 살아간다. 어떤 코드도, 어떤 기획도, 이제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먼저 쓴다. AI는 우리의 창의력마저 자동화하려 한다. 인간이 자랑삼아 말하던 '독창성'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조금 낯간지럽게 느껴진다. 무엇이든 대신 만들어주는 도구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을 묻지 않는다. 대신 ‘무엇이 남았는가’를 계산한다. 일은 줄었지만, 삶이 가벼워진 것 같지는 않다. 이 새로운 공허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정체화하려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침묵이 감돌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역할로 이 침묵을 뚫어보려 한다. 어떤 이는 방랑자가 된다. 선택을 유예하고, 떠남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어떤 이는 소비자가 된다. 경험을 구매하고, 감각을 재생산하며 자신을 정의하려 한다. 창조자는 여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려 하지만, 이제 그의 작업조차 기계와의 경쟁이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한다기보다는, 어떤 역할이라도 부여받기를 기다리는 듯하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의 삶은 방향이 없다. 쏟아지는 정보와 기술 속에서, 이따금 우리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그렇기에 나는 ‘수행자’라는 오래된 존재를 다시 떠올린다. 수행자는 방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완성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오늘도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책을 펴며 하루를 살아낸다. 그 반복은 감옥이 아니라 의례이다. 나 또한 어느 순간부터 자극적인 것들보다, 루틴 안에서 느끼는 질서와 정적에서 더 깊은 충족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충족감은 흥분이나 열광이 아닌, 고요한 흐름 속에서 서서히 깃든다. 수행자는 믿는다. 삶이란 도달이 아니라 과정이며, 진정한 삶은 예외가 아니라 반복 안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물론 그 길은 고요하고, 때로는 외롭다. 반복은 만남을 줄이고, 루틴은 우연을 제한한다. 하지만 그 고립 속에서 나는 해방을 배웠다. 사람은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자신만의 시간 속에서 가장 순수해진다. 때로는 또 다른 고행길을 걷는 누군가와 마주치기도 한다. 전부를 함께 하진 않더라도, 어떤 루틴은 나눌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위로는 충분하다. 나는 믿는다. 수행자의 길은 결국 만남의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언젠가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마치 윤종신의 노랫말처럼. “그곳은 넓지 않아서, 우린 결국엔 만나. 오른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