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언뜻 보면 유사해 보이는 날들의 나열로 이루어져 있다. 하루는 다른 하루와 별반 다르지 않게 흘러가고, 사람은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길을 걷는다. 그러나 그 유사성의 안쪽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들이 응고되어 있다.
반복은 기계적인 것처럼 보이나, 실은 생의 리듬이다. 같은 문장을 다시 읽을 때, 같은 운동을 다시 할 때, 같은 침묵을 견딜 때조차 우리는 같은 자리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달라진다.
반복 없이 차이를 인식할 수 없다. 이 말은 내가 아니라, 질 들뢰즈라는 철학자가 한 말이다. 형상과 물질의 시각적 '다름'만이 차이는 아니다. 동일한 형상과 물질도 찰나의 시간 속에서 마모되고 변한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쉽게 눈으로 보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변화일 테지만.
같은 행위를 반복해도, 반복하는 주체는 결코 어제의 자신과 같을 수 없다. 그 시간의 어긋남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감각, 다른 의미가 조용히 발생한다. 그 미세한 떨림 안에 삶은 고요히 자신을 갱신한다.
의미는 차이에 의존한다. 다른 것과 구별될 수 없다면 의미는 탄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이는 다시 반복에 의존한다. 언어는 두 번 반복되지 않으면 기능을 상실한다. 나의 말이 당신에게 전해져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면, 말은 의미되지 않는다. 독백이라 하더라도, 나의 말이 다시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립될 수 없다.
누군가는 묻는다.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면, 이 모든 성실함과 꾸준함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그 물음 앞에서 말문이 막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그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모든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잠에 들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자신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유일한 순간이기 때문에.
카뮈는 철학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자살이라고 단언한다. 나 역시 그 사유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인간이 느끼는 가장 근원적인 쾌락 중 하나가 바로 '죽음 충동(타나토스)'라는 점에서 그렇다.
당장 내일, 핵전쟁이 벌어지거나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당연히 타의나 상황에 의한 불가항력적인 사태를 모두 예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적어도 '자의'에 의한 죽음만큼은 막고 싶을 뿐이다. 혹여 죽음이 예감되는 상황에서도 태평히 '내일 아침밥은 뭘 먹을까' 고민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싶을 뿐이다.
인간이 죽음을 사유할 때는 아마도 무의미의 지평에 도달할 때일 것이다. 의미 부여의 원동력을 잃었을 때 말이다. 그럴 때,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바로 '차이와 반복'이다. 의미 형성의 장에 매 순간 다시 복권할 수 있도록 하는 '수행'이다.
똑같아 보이는 날들의 연속에서, 삶은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형태를 갖추어 간다. 그 느린 편차 속에서 인간은, 매번 조금 다른 자신을 살아낸다. 그것이 반복의 진짜 얼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어제와는 조금 다른 내일을 다시 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