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은 펄럭이고, 바다는 언제나 저 너머를 가리킨다. 해적들은 오늘도 항해를 떠난다. 그들이 쫓는 것은 전설 속의 보물, ‘원피스’. 그 보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목숨을 걸고 떠난다. 왜일까? 알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는 일, 그 무모함 속에서 인간은 오히려 더 진지해진다. 그런 여정은 단지 보물 찾기의 서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방식에 대한 비유처럼 다가온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나타남이란 스스로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없음’은 단지 결핍이 아니라, 우리 존재 전체를 사유하게 만드는 강력한 계기라는 것이다. 예컨대 죽음이나 무(無), 혹은 ‘불확실성’은 우리의 삶 깊숙한 곳에 침투해, 사유와 선택, 행동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뚜렷이 존재하는 사물이나 개념보다, 늘 한 걸음 물러나 있는 ‘없음’과 더 깊이 관계를 맺는다.
삶도 그렇다. 사랑, 진리, 의미, 구원… 우리는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 본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 존재를 믿는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절대적으로 알 수 없음'이 우리를 더 절실하게 만들고, 더 깊이 책임지게 한다. 타자 또한 그렇다. 타자는 결코 나의 인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인 다름이다. 그러나 그 다름은 나를 위협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흔들고, 나로 하여금 어떤 윤리적 책임 앞에 서게 만든다.
그 책임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온전히 소유할 수 없는 대상 앞에 마주 섰다는 사실에서 온다. 그것은 논리의 결과가 아니라, 감각이고, 태도이며, 존재의 방식이다. 그래서 해적들은 항해를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진짜 보물이 아니라, 그 보물을 찾겠다는 약속과 신념, 그리고 책임의 감각에 이끌려 나아간다.
매일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향한 항해다. 완전한 사랑, 진정한 이해, 이루지 못할 꿈, 죽음 너머의 의미… 그 모든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부재의 현존만이 우리를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게 만들고, 바로 그 불확실함만이 우리 삶을 윤리적으로 만든다.
『칼의 노래』에서 김훈이 쓴 문장 중, 내가 가장 아끼는 구절이 있다. 치열했던 해전을 회상하며, 이순신은 이렇게 말한다. “삶은 집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분산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긴 하되, 그 전환 속에 있을 것이었다. 개별적인 살기들을 눈보라처럼 휘날리며 달려드는 적 앞에서 고착은 곧 죽음이었다.”
삶의 윤리 또한, 어쩌면 그 ‘도래하지 않는 것’과 ‘지금 여기’ 사이를 가로지르는 전환의 순간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른다. 해적들이 깃발을 들고 출항하는 아침, 그들은 목적지를 모른다. 다만 나아갈 뿐이다. 그 방향은 언제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향해 열려 있으며, 도래하지 않을 미래를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