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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오력의 오해

by 널하우스

노력이란 반드시 고통스러워야만 할까.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고통 없는 성장’은 없다는 말을 진리처럼 받아들여 왔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자주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노력을 강요한다. 하지만 나는 오늘 이 오래된 관념에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노력은 꼭 인내의 대가여야만 하는가? 나는 오히려 노력의 본질은 즐거움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최근 한 지인이 내게 물었다. 만약 예기치 못한 사고로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노력이 무효화된다면, 꾸준히 지켜온 루틴과 성취가 한순간에 증발한다면 그 허망함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느냐고. 이는 단순한 비관이 아니다. ‘노력의 실효성’을 고민하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하게 되는 서늘한 질문이다.


하지만 왜 우리는 극단적 상황을 항상 파국으로만 가정할까. 노력 끝에 상상 이상의 성취를 거머쥘 확률 또한 분명 존재하지 않는가. 만약 성과의 귀결을 확률의 문제로 본다면, 성공과 실패는 정규분포의 양 끝단처럼 서로를 상쇄하며 무의미해질 뿐이다. 결국 이런 결과론적인 사고만으로는 노력의 진가를 온전히 포착할 수 없다.


성과에 초점을 맞추는 순간 노력은 단지 ‘통과해야 할 과정’으로 전락한다. 최소한의 투입으로 최대의 결과를 뽑아내는 ROI(투자 대비 수익률)의 관점에서, 노력은 짧을수록 좋은 효율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멈춰 서고 싶다.


우리가 성과를 재는 기준, 즉 ‘도량형’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100m 기록만으로 인간의 신체 능력을 다 설명할 수 없듯, 노력의 가치 또한 단일한 잣대로 측정되지 않는다. 게다가 성과라는 지표는 얼마나 유동적인가. 오늘 박수받던 결과가 내일은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하기도 하고, 경제적 가치조차 세월에 따라 뒤바뀌곤 한다. 노력만큼이나 성과 역시 미래라는 시간 앞에서는 무기력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다시 노력할 수 있을까. 정말 손쓸 방법은 없는 걸까? 한 가지 길이 있다. 바로, 기존의 도량형을 넘어서는 것이다.


자로 잴 수 없는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 전문가나 장인, 그리고 스승들이 거쳐 온 수만 번의 반복은 단순한 고통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 반복의 시간 속에는 내적 유희, 몰입, 그리고 자기 이해의 확장이라는 깊은 차원이 숨어 있다. 이는 외부의 측정 장치로는 결코 포착되지 않는 그들만의 영토다.


우리는 디오게네스처럼 모든 소유를 버리고 살 용기는 없다. 가족과 생계, 사회적 인정과 미래라는 현실이 우리를 다시 노력의 현장으로 되돌려놓는다. 노력을 증오하며 발버둥 치면서도, 어느 순간 다시 그 노력을 껴안고 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 아이러니하지만, 그런 모순적인 태도야말로 우리가 삶을 책임지고 있다는 성숙의 증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노력의 이데올로기에도 피로를 느낄 때가 됐다. "노력하기 싫다!"는 선명한 감정을 굳이 "무엇 때문에"라는 거창한 논리로 포장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력이 반드시 고통의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이제 노력이란 녀석의 얼굴을 좀 더 살뜰히 살펴봐 주자. 이왕 싫어할 거라면, 그가 가진 책임감과 의외의 다정함까지 다 알고 나서 싫어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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