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의 시대에 콘텐츠의 종말을 고하는 건 어리석은 일일까. 실패 비용이 두려워 도전하지 못한다는 말은 이제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아이템을 발굴하고, 가게를 차리고, 브랜드를 론칭하는 일들은 점점 경량화되었다. 작년 한 해, K-뷰티의 확산으로 인해 화장품 창업이 4600건을 넘었다고 한다. 아이디어만 있다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세상. 가능성은 무한하다.
유튜브엔 전 국민이 콘텐츠를 전시한다. 기라성 같은 교수들의 전공 강의를 침대맡에서 듣고, 아침엔 양치하며 유명 애널리스트의 경제 분석을 소비한다. 최고 셰프의 레시피, 30년 내공의 물리치료사의 스트레칭 팁이 스마트폰에서 스트림 된다.
똑 부러지는 콘텐츠가 하나 나오면, 불과 몇 시간 안에 리빌딩된 콘텐츠가 쏟아진다. ‘밈’의 생명은 몇 달을 넘기지 못한다. 아니, 앞으로는 몇 주, 며칠 단위로 짧아지겠지.
이제 프로덕트는 기능성의 우위에서 가치의 우위로 전환되었다. 다이소의 몇천 원짜리 컵도 가게에서 쓰기엔 충분한 품질이다. 컵 자체의 완성도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사용되는지가 중요하다. 기능 점수에서 가치 점수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누군가 그랬다. 여행자가 길을 잃는 것은 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은 길이 있기 때문이라고. 맘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손을 대면, 제대로 되는 게 없다. 그래서 결국 탓해 보기로 했다. 이게 다 콘텐츠 네 녀석 탓이라고. 투명해지고, 가벼워지고, 빨라진 바로 이 콘텐츠의 탓이라고.
활동 범위와 소통의 창구는 날마다 확장되는데 인간의 포용력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혐오는 들끓고, 적자생존·각자도생에 감화된 이들은 늘어난다. 이상한 일이다. 개인의 역량은 마치 하나의 문명처럼 확장되고 있는데 왜 야만성은 길항되지 않을까. 너무 많은 콘텐츠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콘텐츠가 무엇인지, 삶에 도움이 되는 콘텐츠가 무엇인지 식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1차적 원인은 콘텐츠에 있다. 2차적 원인은 그것을 담는 ‘컨테이너’에 있다. 악성 콘텐츠는 악성 컨테이너에서 배출된다. 결국 0차 적 원인은 다시 컨테이너다. 탓을 하려 했는데, 돌고 돌아 결국 제 자신이다. 예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을 ‘우주’라 불렀는데, 고작 경량문명 수준의 확장에도 이토록 애를 먹는 나 자신이 스스로도 애처롭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지금이라도 콘텐츠는 잠시 안녕하고, 나의 컨테이너를 살뜰히 돌볼 수밖에. 콘텐츠에게 종말을 고한다. 네 녀석을 담을, 멋진 그릇을 준비할 때까지. 아주 가끔만 마주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