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선배들과의 술자리는 으레 후배의 연애사나 결혼 이야기를 안주 삼기 마련이다. 잔을 기울일수록 대화는 구체적으로 흘러간다. 외모, 경제력, 성격, 심지어는 부모의 노후 준비까지. 그 모든 항목을 조목조목 따지다 보면, 어느새 결론처럼 들려오는 말이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 최고야.”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술자리는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자신의 모자람과 나약함까지 사랑해 주는 사람, 얼마나 귀하고 어여쁜가.
하지만 말이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아무 인연도 없던 타인에게, 감히 그런 전적인 수용을 기대할 수 있는 걸까? 처음엔 이 회의적인 생각을 술기운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곧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달라는 요구는 지나치게 부당했다. 나도 아직 ‘있는 그대로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데 말이다. 그건 바람이지, 사랑의 전략은 아니다. 선배님들께는 죄송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조용히 결심했다.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사랑은 흔히 진심에서 비롯된다고 말하지만, 그 감정이 늘 솔직함과 나란히 서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건네는 말들이, 때로는 상대의 아픔이 되는 순간이 있다. 편의점에서 초코우유의 빨대 포장을 벗기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적극성은 가시처럼, 아니 이 빨대처럼 뾰족하다고. 나의 솔직함이 상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면, 그 솔직함은 과연 사랑일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쏟아내는 것보다, 그것을 억제하는 쪽이 타인을 향한 더 깊은 책임감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이 받게 될 상처를 나는 통제할 수 없다. 목구멍으로 삼켜지는 사랑이 아무리 순수하고 달콤해도, 그것만으로는 상대를 보호할 수 없다. 감정에는 구조가 없고, 통제가 없으며, 무엇보다 윤리가 없다. 사랑이 우리에게 남기는 유일한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감정의 무능력함을 자각하는 일일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형편없이 무력하다. 마치 다 마신 후 구겨져 버려지는 이 우유갑처럼 말이다. 그러니 부서질까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력한 사랑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은 폭력적이다. 타인을 위한 배려는 감정의 해방이 아니라, 절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상처 주지 않는 것'이 사랑의 가장 현실적인 윤리가 아닐까.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타인에게, ‘공감’과 ‘이해’를 전제로 한 사랑은 오만할지도 모른다. 내 치부를 기꺼이 이해해 주길 바라는 대신, 차라리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그게 나에게 맞는 방식일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 최고야.” 선배들은 왜 그런 결론에 다다른 걸까? 진열대 위, 바르게 포장된 식품들처럼 정돈된 나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서? 그렇다고 단정하기에는 현장에서 느껴진 기색은 ‘날 것 그대로’의 뉘앙스는 아니었다. 체념에 가까운 단언처럼 느껴졌다. 살아보니 어쩔 수 없었다는 현실적 감각 같았다. 내가 너무 낭만적으로 해석했던 것일까.
편의점을 나서자, 여름의 습한 공기가 피부에 들러붙었다. 이 불쾌감은 있는 그대로 나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나. 나는 과연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다.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른다. 벅차고 뜨거운 애착보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그리움을 더 오래 품게 되는 건. 누군가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 주길 바라지 않는다. 아무래도 오독할 수 밖에 없을 테니. 나의 의지이길 바라지만, 어쩌면 숙명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