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민주주의가 경쟁으로 굴러간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것은 경쟁 그 자체가 아니라, 경쟁이 무너졌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어떤 취약함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끔 잊는 것은 경쟁의 잔혹함이 아니라 경쟁이 공생을 약속한다는 착각의 시간들이다. 결국 경쟁의 건전성은 ‘세계’라는 시스템에 대한 기여가 축적될 때 유지된다.
디지털 세계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세계를 거대한 오픈소스 라이브러리로 가정한다면, 우리는 각자의 PR(Pull Request) — 제안하고, 검토받고, 병합되는 일련의 과정 — 을 통해 시스템에 기여한다. 경쟁은 배제나 파괴가 아니라, 더 나은 병합을 향한 검증으로 전환된다.
탈중앙, 자율성 같은 선진적 사상이 오늘날 IT 시스템의 모토가 된 이유는, 디지털이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상대적으로 덜 받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기술은 현실 세계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Solution)에 머무르지 않는다. 디지털 환경에서 명확히 포착되는 데이터는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고, 가설을 시험하며, 예측을 반복하게 만드는 창발적 에볼루션(Evolution)의 장으로 기능한다.
현실의 불확실성을 감당하는 방식은 점차 기계 모델과 실험의 언어로 이동하고 있다. 탈레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초기 철학자들이 동시에 과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떤 필요와 사상에 의해 기술은 발견되고 발명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기술이 오히려 새로운 사상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듯 보이는 건 과한 염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