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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연구소 May 04. 2023

정책의 도식 너머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2부_변재원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로고 (출처: 셰어)

기후위기라는 우산 아래


‘2015년: 장애/여성 재생산권 새로운 패러다임 만들기 기획단’, ‘2017년: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2019년 이후 2년에 걸친 8개 영역(청소년, 성소수자, HIV/AIDS 감염인, 장애, 이주, 빈곤, 노동, 여성) 50개 단체 간담회 진행’. 셰어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단체가 아니라 무려 5년 이상의 준비 과정을 통해 출범했다.


셰어의 설립 역사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일방적으로 단체를 설립한 뒤 다른 시민단체와의 협력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기획단과 공동행동, 간담회 등 다양한 연대활동 속에서 단체의 상이 서서히 정립되었다는 점이었다. 셰어는 단체 설립 이후 지금도 다양한 기획운영위원, 연구위원, 참여위원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며 개방적인 단체 활동을 펼치며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과 재생산 연구자 네트워킹 팀 ‘미라클 토요일 세미나’까지 운영하며 다양한 영역의 연구자들이 모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기도 한다. 


어떤 시민단체는 특정 사회 의제를 구성원들끼리 전담해서 밀착하는 정책의 ‘대리인’ 같은 모습으로 활동하는 데, 셰어는 협력을 통해 외연을 확장하는 조직의 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한국 사회에 아직은 낯선 재생산정의(justice)를 정의(definition)하는 문제는 일부 활동가만의 책임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share)하는 공통의 과제였다.


셰어는 조직 내외부적으로 타인과의 연대활동을 중요하게 여겼다. 작년 전장연 이동권 시위가 한창일 때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지지하고자 재생산권과 이동권을 연결하는 내용의 글을 쓰고 배포하는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민단체의 활동에 결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연명하거나 연대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셰어의 활동가들은 특히 향후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비단 환경단체뿐만 아니라 모두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영: 기후정의가 정말 중요한 의제 같아요.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사회적 소외계층이나 소수자와 같은 이들이 더 큰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 문제는 단지 소수자가 더 피해를 입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기후위기를 유발하고 그에 대응하는 국가와 자본의 작동 방식이 사회 취약계층과 소수자의 삶의 조건을 더욱 취약하게 만듦으로써 이들 공동체의 재생산 자체를 침해하는 문제가 되거든요. 그래서 기후위기가 근본적으로는 체제의 문제라는 이 문제의식에 다 같이 연결되어야 될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늘 고민이 생겨요. 기후정의와 관련한 논의를 앞으로 더 만나고 확장하면 좋겠어요. 주로 특정 제도를 바꾸는 투쟁을 중심으로 해왔던 운동에서는 맞물리는 다른 문제들을 고려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있었는데요. 여러 영역의 활동가들이 같이 만나서 체제 전환에 맞물리는 문제의식을 나누면 좋겠어요.


타리: 활동가들은 ‘체제를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땜질만으로는 안 된다.’ 이렇게 외치고 있어요. 기후위기는 사실 삶의 방식을 바꾸는 문제이기도 해서 근본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결국 모든 운동이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의제예요.


2023년의 기후위기는 시민사회계를 아우르는 우산 같은 의제와도 같았다. 작년 폭우 속 발생한 참사만 하더라도, 기후위기는 단지 기후환경의 문제를 넘어 불평등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사회적 소외계층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 집단이 먼저 물에 잠기거나, 소중한 터전을 잃었다. 올해 너무 이르게 활짝 피고 진 벚꽃의 꽃말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불안함이었다. 누군가는 벚꽃을 보며 심각해지는 기후위기를 몸소 체감했다. 


나영과 타리 활동가는 기후위기에 직면한 지금, 그간 살아온 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꾸어야만 하는 큰 결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보았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우산 아래 모두들 모여야만 불평등한 대응책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등대로서의 공공성


인터뷰 중 나영과 타리 활동가는 은연중 ‘공공성’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성적 권리와 재생산정의의 용어 앞에서 공공성은 그들의 중요한 가치였다. 가령, 나영 활동가는 다른 단체와 함께 보건 의료 내 임신 중지를 다루는 과정에서 어떻게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반면, 타리 활동가는 2022년 전장연의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를 두고, 정권이 장애인의 권리에 응답하지 않는 현실로부터 공공성의 위태로움을 직감했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공공성의 렌즈에 투과된 모습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공공성은 사회가 억압과 차별에 뒤덮이지 않도록 환한 빛을 비추는 등대처럼 언급되었다. 두 활동가에게 직접 공공성이 무얼 가리키는지 물어봤다. 인터뷰 중 몇 차례 언급된 공공성이라는 단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다. 생각의 시간이 필요한 질문을 두고,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두 사람 다 골똘히 고민하다가 나영 활동가가 먼저 운을 뗐다.


나영: 제가 생각하는 공공성은 선별적이지 않을 것을 뜻해요. 저는 현재의 사회보장 체계나 복지 체계와 같은 시스템이 자아내는 선별성에 대해 많이 고민해요. 시스템의 공백을 선별적 지원 체계로 메우려는 임시적 조치들이 결국 더 많은 이들을 착취와 억압, 차별에 내몰리게끔 하고 있기 때문이죠. 선별적인 지원 체계가 전체 문제를 다 메꿔줄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있어요. 그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이 선별적인 대상으로 선정이 되어야 최소한의 삶이라도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고 잘못 생각하게 되는 거고요. 선별에 기반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공공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타리 활동가가 나영 활동가의 대답에 덧붙여 말했다. 


타리: 저는 공공성은 계속 도전받는 개념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도는 늘 포괄하지 못하는 외부의 경계를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공성이 현행 제도가 가진 경계를 질문하고 보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는 거죠. 공공성조차 선별적이게 될 테니까요. … 우리가 제도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제도가 최대한 권리를 담을 수 있도록 강제하는 가치에 공공성이 기반하는 것 같아요.


2023년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인권위원으로 참여하는 나영과 타리 활동가 (출처: 셰어)


타리와 나영이 말하는 공공성의 이미지는 줄곧 등대 같았다. 어두운 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캄캄한 바다의 경계를 식별할 수 있도록 강한 불빛을 끝없이 쏘는 등대. 배들을 향해 어디에서 출발했으며 어디로 돌아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등대. 


사람 있고 법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두고도, 법이 있어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착각하게끔 만드는 각종 ‘시스템’, ‘체계’, ‘정책’을 비판하는 등대. ‘정책’의 이름을 건 저마다의 배들이 타인을 소외시키는 무모한 항해를 시작할 때. 때로는 그들 정책이 사람 위에 군림하고자 할 때, ‘너무 멀리 나간’ 배들에 대해 다시금 출발지와 도착지를 상기시키는 등대로서 공공성이 존재했다. 


“선별”이라는 논리 아래 자격을 제한하고, 지위를 나누고, 인종과 장애와 성정체성을 분리시키며, 받을 만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현재의 ‘너무 멀리 나간’ 제도에 대해 공공성의 이름을 한 등대는 끊임없이 세상에 경고등을 비췄다.



쪼개진 정책을 넘어 통합된 권리를 향해


인터뷰 당시 나는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라는 이슈가 시민 사회의 많은 분야 중 어디쯤에 속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예컨대, 장애여성 영역의 일부로 보면 되는 건지, 보건의료 영역의 일부인건지, 건강권 운동인지. 셰어의 위치를 구조화하기 위해 질문했다. 사회운동이라는 영역 안에서 성과 재생산을 어디에 위치 지으면 될지. 어느 규격에 맞는 볼트, 너트인지 직접 묻는 질문에 타리가 그건 정책의 도식이라고 선을 그어 말했다. 


가령 성적권리 하나만 두고도 성교육으로, 성건강으로, HIV/AIDS 감염인들을 위한 실천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셰어의 활동을 ‘건강권 정책 운동’ 등으로 축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영 활동가가 이어서 말했다.


나영: 셰어는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 재생산정의 등 이런 주제들을 토대로 그간 개별 정책 영역이나 지원 영역으로만 구획되어 있었던 것의 프레임 자체를 전환하는 운동을 하고 있어요. ‘모성권’, ‘모성 지원’, ‘모성 보호’ 이런 식으로 나눠진 것을 재생산의 권리로 바꾸어 생각하고요. 노동운동 안에서도 단체협약 등에서 노동자의 요구가 주로 ‘모성 보호’ 혹은  관련된 ‘몇 가지 휴가’라든지 ‘임금’이라든지 이런 내용으로 구획되어 있는 것을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보는 거죠. 성과 재생산의 권리에 대한 보장을 토대로 현재의 노동 환경을 바꿔 나가자는 제안을 통해 기존 의제의 폭 자체를 확장하면서, 프레임을 바꾸는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 같아요.


성과 재생산 운동을 개별 정책 단위로 치환하지 않는 이상,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지 않겠냐는 말에 타리 활동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정책 중심의 패러다임이 포괄적인 권리 중심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며 인구정책을 예시로 들었다.


타리: 과거에는 국가가 인구가 너무 많다면서 ‘가족계획 사업’ 등을 통해 인구를 줄이라고 명령하다가, 지금은 저출산 고령화 시대가 되면서 많이 낳으라고 거꾸로 말하는 시대로 바뀌었죠. 개인이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유지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것인지. 성적 활동이나 재생산 활동을 어떻게 결정하고, 원하는 대로 해나갈 것인지. 그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와 역할은 무엇인지 등에 관한 논의가 우선되어야 해요. 권리에 기반한 논의 없이 단지 국가 발전을 위해 조정하고 관리하는 것이 기존 인구 정책인데요. 이러한 정책 패러다임에는 억압적인 관점이 너무나도 강하게 담겨 있죠.


국가는 필요에 따라 낳거나 낳지 못하도록 인구정책을 통해 재생산을 통제했다. 그러한 인구정책은 강압적인 통치의 한 방식이며, 시민의 권리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국가적 관리의 차원으로 사람을 바라보았다. 타리 활동가는 이어서 파편화된 개별 정책이 소외시키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정책은 ‘정상적인 사람들’의 존재만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타리: 정책의 기조에는 누군가의 재생산을 지원하거나 지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차별 행위들이 벌어지고 있고, 그것을 정책 효과라고 보고 있어요. 당장 제한적인 신혼부부 전세 대출이 그렇죠. 그런 문제들을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국가가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정책의 도식에서 시민들은 책임 있고 자유로운 성관계를 갖는 존재이기 전에,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했다.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신혼부부를 중심으로 전세자금을 대출해 주거나, 아파트 청약에 당첨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인구정책의 대표적인 예라고 보았다. 


이러한 접근으로는 인구문제도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소외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셰어가 제작한 성과 재생산권리 보장 기본법(안) '검은 시위에서 국회까지 폐지를 넘어 권리를!' 자료집 (출처: 셰어)


타리 활동가는 개별 정책에 관한 논의만으로는 인간이 겪는 소외나 억압의 문제에 근본적으로 다가갈 수 없다고 보았다. 


타리: 소위 규범적이지 않은, 생산적이지 않은, 정상적이지 않은 몸들이 억압을 당하는 여러 가지 정책 기제가 있어요. 저마다 구획된 정책을 그대로 둔 채로 논의를 진행하면 사실 미세하게 연결된 억압을 같이 볼 수 없어요.


타리 활동가는 장애인을 시설에 수용하는 정책, 성풍속을 단속하는 사회의 분위기, 동성 군인의 성관계를 군형법 상 추행죄로 처벌하거나, 감염인의 성관계를 전파 매개 행위로 보고 불법화하는 국가의 논리에 시민의 성과 재생산권리를 박탈하는 구조가 숨겨져 있다고 보았다. 성적 억압에 기반한 정책이 다양한 시민의 재생산권을 침해하는 가운데, 신혼부부를 비롯한 특정 인구 계층에 임신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는 것은 국가의 성적 권리 통제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저마다 전문가들이 모여 작금의 사태는 임신 정책의 문제다, 아니다 출산 정책의 문제다, 아니다 보육 정책의 문제다 등으로 귀결시키는 정책의 논리는 해결책이 되지도 못할뿐더러, 인간의 권리마저 지워버린다는 것이 타리의 생각이었다. 


사람이 있어 제도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 종종 떠올랐다. 셰어의 활동가들은 구획된 정책에 기반을 둔 사고가 아니라, 권리에 기반을 둔 사고를 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그것이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활동이 바라보는 세상이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활동에 함께하고 싶다면


1. 정기·일시 후원 참여하기

셰어는 누구도 차별받거나 배제되지 않고, 자유롭고 건강하게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누리며, 충분한 정보와 평등한 자원을 바탕으로 서로의 역량을 키워나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셰어의 정기후원 회원 ‘조이’가 되면  이처럼 다양한 셰어의 활동을 지지하며 각종 단체 행사에 참여하고 자료를 받아볼 수 있다.

셰어의 후원 신청은 이곳에서 할 수 있다.


2. 이슈페이퍼·기타 발간 자료 읽기

셰어는 주기적으로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다양한 해외 이슈페이퍼 및 기타 자료를 번역·발표한다. 2023년에도 『(국내이슈) 소수자의 즐거움을 바라지 않는 사회에 저항하는 성교육』, 『(리뷰) 욕망에 대한 성찰은 왜 ‘섹스할 권리’의 확장으로 연결되지 않나』 등 다양한 이슈페이퍼를 발표할 뿐만 아니라, 학술대회 자료집을 게시했다.

셰어의 지식이 담긴 다양한 이슈페이퍼 및 자료 등은 이곳에서 볼 수 있다.


3. 에브리바디 플레져북과 섹스 빙고 활용하기

셰어 내 에브리바디 플레져랩 팀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포괄적 성교육을 위한 에브리바디 플레져북과 섹스 빙고를 판매하고 있다. 다양한 몸과 관계, 다양한 성적 즐거움, 모험도 즐거운 탐험이 될 수 있도록 검열 없는 가이드 및 모두의 성건강을 찾기 위한 가이드가 필요한 이들 모두 자료를 활용해 보기를 강력 추천한다.

셰어 플레져랩 팀의 자료는 이곳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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