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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연구소 May 04. 2023

따로 또 같이

노동건강연대 2부_변재원

노동건강연대 로고 (출처: 노동건강연대)


개인화와 끊어짐의 징후들


'단단한 삶'의 저자 야스토미 아유무는 "자립은 많은 사람에게 의존할 때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즉, 타인의 의존에서 벗어나는 게 자립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자립이 가능한 셈이다. 서로에게 의존할 수 없는 오늘날의 노동시장은 자립이 불가능한 공간이 됐다.


자유로운 자립이 불가능하고 오직 파편화된 존재로 남는 시대로 위축되는 중이다. 혼자서 살아남을 것, 이기적으로 행동할 것과 같은 시대적 착오가 새로운 가치관으로 형성되었고, 구체적으로 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라, 타인의 실패를 보고 성공을 꿈꿔라, 돈을 더 많이 벌라와 같은 말들이 일상의 규칙으로 자리 잡았다.


전수경 활동가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지적하기 위해 공공성이라는 단어를 몇 차례 강조했다. 노동건강연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공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묻자, 그는 공공성은 타인을 위해 제공하는 모든 노동에 숨겨진 가치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공공성은 단지 공공 부문 노동자들의 소속과 규율을 정하는 협소한 의미가 아니었다. 오늘날 공공성이 위협받는다는 것은 타인이 제공하는 노동의 의미가 시장 논리에 대체되거나 무시되는 것을 가리켰다.


전수경: 타인의 노동이 없이는 나도 존재할 수 없고, 이 사회가 존재할 수 없어요. 모두의 노동이 함께 더해져 사회가 운영되는 건데 지금은 오히려 더 개인화되고 있어요. 국가는 저마다 혼자 생존하라는 듯 다 떨어뜨려놓고, 사회적 연결망을 끊어내고 있죠. 어떤 조직을 만들고, 네트워크를 운영하며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목소리를 내야지만 그 사회에서 더 묻히거나 고통받는 사람이 없어질 텐데... 그건 당연한 진리라고 생각하거든요. 모여서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데...


전수경 활동가는 타인과 연결되는 것으로부터 공공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모일 수 없고 함께 말할 수 없는 오늘날 사회 모습 속에 공공성의 상실을 느끼고 있었다. 타인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 자신의 노동으로 타인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오랜 공동체의 규칙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오늘날. 국가는 노동 현장의 시민들이 모여 연대를 이루고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막고 있다고 보았다. 그 결과, 소외되고 고통받는 노동자들은 서서히 고립되었다.


각개전투 속 노동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인적이어야만 했고, 이기적이어야만 했으며, 산업화의 기적을 믿어야만 했다.


전수경: 지금 이 사회는 오직 개인의 이기적인 동기에서만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비추고 있어요. 그런 형태로 사회가 돌아가는 게 가장 무서운 일이 아닌가 싶어요. 저는 그게 제일 두려워요.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가 서로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가는 데, 이걸 마치 각각 이기적인 개인들끼리만 사는 것처럼 그리는 건... ‘너도 이기적으로 살아’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뉴질랜드 사회과학자 스킬링(Skilling, 2021)은 이러한 새 시대의 통치의 문화가 신자유주의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신자유주의는 단지 자유방임적 최소국가가 만드는 정책들을 일컫는 게 아니라, 끝없는 경쟁을 종용하는 정치적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는 단지 이웃과의 협력 동기조차 개인의 이기심으로 설명하는 개별화된 책임과 보상 속에서 합리화되는 반인간적 역사의 모습을 시대정신으로 강조했다.


전수경 활동가는 인간의 이기심 하나만으로 모든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시대적 믿음을 우려했다. 오직 시장 논리만이 인정받는 상황에서 제안되는 규칙들에 좌절을 느꼈다. 노동자를 직접 고용을 하지 않기 위해 쪼개기 노동을 시키는 것이 그 대표적 모습이라고 보았다. 5인 미만 사업장에 고용된 노동자에게 주휴수당을 주지 않거나, 4대 보험을 가입시키지 않거나,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한 목적 아래 쪼개기 노동이 유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수경: 현 근로기준법 상 5인 미만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업체들은 법을 대부분 피해 갈 수 있어요. 작은 사업장은 관련법상 많은 적용 예외 조치가 취해지는데요. 특히, 주 15시간 미만으로 일하면 주휴수당을 주지 않을 수 있고, 월 60시간 미만으로 일하면 4대 보험을 가입 안 해도 되는 내용들이 있어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생각하면 딱 14시간까지만 일을 시키는 거죠. 월 생활비가 필요한 여성 노동자들은 편의점에서 14시간 일하고, 다른 카페에 가서 또 14시간을 일하는 방식으로 14시간짜리 알바를 2~3개씩 돌아요. 그래야만 월 생활비를 벌 수 있는 거죠.


노동자를 하나의 부품처럼 인식하는 사회가 만든 ‘효율적 경영 기법’은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는 것으로 모자라, 소속 없는 프리랜서를 양산했다. 전수경 활동가는 같은 업무 공간에서 일하는 이들이 사업장에 고용된 형태가 아니라 프리랜서로 계약되기 시작했다며 ‘개인사업자가 된 아르바이트생’의 사연에 대해 말했다.


전수경: 최근에 사회적으로 대유행하는 방법인데요. 3.3%를 떼고 일하는 개인 사업자 프리랜서가 너무 많아졌어요. 특히 놀라웠던 건 카페 알바입니다. 개인소득세 3.3%를 떼는 식의 계약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리고 여성들이 사실 자영업으로 보기 어려운 네일 숍, 미용실, 애견 산업에서도 프리랜서 형태의 계약이 굉장히 많았어요 서비스 산업 전반에 이런 형태가 퍼져있어요.”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하는 것


노동건강연대가 기억하는 2022년의 노동운동은 어떤 장면이었을지 궁금해 질문했다. 그리 밝을 것 같지만은 않았다. 과연 작년 한 해 노동계의 다양한 이슈 중 어떤 사건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지 질문하자 그는 예상처럼 표정을 찡그렸다. 작년을 회상하며 대답하는 과정에서 한숨을 쉬긴 했지만 지체 없이 바로 <화물연대>의 파업을 이야기했다.


전수경: 저는 화물 노동자 파업이 가장 생각나요. 울면서 파업을 접었던 사진 속 노동자들의 모습이 너무 마음 아파요. 정부는 마치 화물 노동자들이 돈 많이 버는 자영업자인 것처럼 호도해서 ‘이미 많이 버는 자영업자가 더 달라고 한다.’는 식으로 그렇게 공격했죠...


2022년은 화물노동자에게 잔인한 한 해였다. 연초부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유가 폭등’ 사태가 닥쳤다. 가장 큰 피해자는 유류비 부담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화물노동자들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달 전에는 중국 무역 갈등 속에서 요소수 대란까지 겪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2020년 3월부터 3년간 한정적으로 시행된 화물운송시장의 ‘안전운임제’마저 폐지될 위기에 처했다. 화물노동자들의 최저임금제도가 사라진다는 뜻과도 같았다. 참다못한 화물연대는 2022년 6월 총파업을 통해 ‘안전 운임제의 지속’을 외치고, 다양한 트럭 운송 사업자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품목을 확대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국토교통부는 안전운임제가 시장경제원리에 반하는 주장이라며 화물연대와의 대화를 거부했다. 나아가 정책 무력화까지 예고했다. 정부는 화물노동자에 대한 존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일방적인 화물노동자의 투항과 무조건적인 양보를 요구했다.


분노한 화물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저항을 시작했다. 정부는 운송을 강제하는 ‘업무 개시 명령’과 함께 안전운임제를 폐지를 확정하는 등 강경한 진압을 연속했다. 대화보다 앞선 공권력은 화물노동자들의 삶을 산산조각 냈다. 수많은 노동자가 고소·고발되거나 잡혀갔고, 그대로 화물운송 노동자들은 파국을 맞았다.


화물노조 파업 당시 사진 (출처: 공공운수노조)


전수경: 그분들이 주장했던 안전운임제의 추가 및 확대, 제도화 보장 요구를 위한 파업을 정부가 정말 심하게 공격해서 노동자의 안전운임제가 확대되기는커녕 거의 폐지 수준에... 그렇게까지 될 줄 저도 몰랐어요. 그분들이 파업을 접으면서 울던 사진이 기억에 오래 남아 있어요. 너무 마음이 아파서요.


전수경 활동가는 정당한 노동의 권리를 찾고자 했던 화물 노동자를 비난하는 사회적 시선들이 너무 괴롭다고 말을 덧붙였다.


전수경: 지금 노동조합은 사회적으로... 완전히 뭐랄까요... 조폭처럼 그려지는데요. 화물연대가 거기에 이용당했다고 생각해요.


그는 고립된 화물운송 노동자들의 곁을 지키며 함께 하는 것을 2023년의 최우선 과제로 인식했다. 특히 노동자들이 끝없는 공격을 받는 현실 속에서 시민의 연대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리로 나선 노동자들이 내몰리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가 지지하는 노력이 꼭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익집단 대 행정부의 갈등처럼 비추어지는 이 고립된 프레임을 깨는 것은 노동자의 몫이 아니라 함께 곁에 있는 시민의 책임과도 같았다.



같이 하는 작은 사람들


노동건강연대는 노동자의 건강과 권익을 이야기하는 단체이면서도,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독특한 단체였다. 노조에 가입조차 할 수 없는 미조직 노동자들을 찾아 지원하는 것이 단체의 목표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노조에 속하지 않은 채로 운영하기에 여러 어려움이 있지는 않을까. 독립된 단체로서 함께 힘을 내기 위해 평소 긴밀하게 협력하는 단체가 어딘지 묻자 노조 외에도 다양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시민건강연구소, 보건의료단체연합 등 크고 작은 연구소와 연대체의 이름들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흥미로운 단체 두 곳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일터에서 겪는 어려움을 상담해 주는 <직장갑질119>와 플랫폼 노동자들의 든든한 커뮤니티인 <라이더유니온>. 전수경 활동가는 두 단체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직장갑질119의 단체명을 정하고 출범식 사회를 보는 데에는 함께 했다고 말했다. 특히 노동 운동을 어렵게 느끼는 시민들을 위해 ‘노동’ 혹은 ‘노동자’라는 말 대신 ‘직장’이라는 단어를 넣어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했다.


라이더유니온 역시 출범 초기부터 오랜 인연이 있는 단체였다. 라이더유니온이 플랫폼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막 시작했을 때 박정훈 전 위원장과 적극적으로 소통했을 뿐만 아니라, 라이더유니온이 주최하는 다양한 기자회견에 찾아가 연대하고 지원하는 재미가 쏠쏠했다고 말했다. 쑥쑥 커지는 라이더 노동권 운동을 보면서,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에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덧붙여, 비록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단체들은 아니지만, 성수동의 제화·인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 당시에도 자원과 지식을 적극적으로 공유했다.


노동건강연대는 여러 단체가 다 같이 성장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다양한 시민단체의 기자회견 발언 요청, 성명서의 연명 요청, 토론회의 토론자 요청, 투쟁 현장에서의 연대 요청까지. 노동건강연대가 직접 주최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이웃단체가 이끌어가는 모든 활동이 자기 단체의 활동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문득 소수의 활동가들이 이런 일들을 모두 소화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작은 규모의 노동건강연대가 연구, 연명, 연대 활동 등을 소화하는 게 가능하냐고 묻자, 전수경 활동가는 활동회원의 힘을 언급했다.


전수경: 각자 본업을 따로 갖고 있지만 단체 운영을 같이 책임지고 있는 분들이 있어요. 넓은 차원에서 회원으로서 소속감을 갖고 필요할 때마다 지원해 주시는 거죠. 그런 분들과 연구, 저술 작업을 같이 하고 있어요.


본업이 있으면서 노동건강연대를 돕는 회원들은 어떤 마음으로 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걸까. 느슨한 연대로서 함께 참여하는 이들의 계기와 마음이 궁금해졌다. 전수경 활동가는 단체를 함께 꾸려가는 회원의 노력에는 다양한 동기가 깃들여 있다고 말했다.


전수경: 과거에 사회 운동을 했지만, 지금은 본업으로 돌아가 의사가 되거나, 노무사로 일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 분들도 많이 도와주세요. 어떤 분들은 노동 관련 강의가 필요할 때 강사로 가주시기도 하고요. 아니면 재정에 도움을 주려고 방법을 찾는 분들도 계세요. 본업에 계신 몇몇 분들은 미안한 마음을 안고 참여하시기도 해요.


노동건강연대 2023년 총회 사진 (출처: 노동건강연대)


노동건강연대 회원들은 적극적인 연대 활동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게 많지 않더라도, 저마다 십시일반 일을 나누어 함께 단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인천 어느 병원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환자를 보고, 산업재해를 직감한 의사 역시 노동건강연대의 회원이었듯.


지금 그리고 앞으로 계속 노동건강연대는 회원들과 함께 우리 사회 구석구석 위치한 노동자를 만나고, 일하는 사람들의 생명과 권리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는 파수꾼의 역할을 도맡을 것이다. 21세기 한국 사회의 노동자 건강의 역사를 함께 지켜왔듯이.



노동건강연대 활동에 함께하고 싶다면


1. 정기·일시 후원 참여하기

노동건강연대는 비영리 민간단체로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어떠한 후원도 받지 않는 단체다. 오롯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후원에 기반하여 운영되는만큼, 정기후원과 일시후원이 단체의 활동을 지속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여건을 마련한다.

노동건강연대의 후원 신청은 이곳에서 할 수 있다.


2. 기획강좌·책읽기 모임 혹은 발간 자료 읽기

노동건강연대는 필요에 따라 노동과 건강에 관한 기획강좌 및 책읽기 모임 등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거나 보고서를 발표한다. 2023년에도『4월 책읽기 모임: 실명의 이유』, 『노동건강연대 이사 기념 집들이 토크』,  『청년여성 산재회복 지원사업 보고서 발간』 등 다양한 소식을 알렸다.

노동건강연대의 지식이 담긴 다양한 결과물은 이곳에서 볼 수 있다.


3.오마이뉴스 [이달의 기업살인] 기고 읽기

노동건강연대는 매달 오마이뉴스에 [이달의 기업살인]을 정기 기고하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이 기고의 취지는 "한 해 2000명의 노동자가 일을 하다 퇴근하지 못하는 산재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실 속, 매달 최소한 언론에 보도된 노동자의 죽음만이라도 한데 모아 노동자의 '조용한 죽음'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책임을 묻기 위한 밑거름을 만들기 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노동건강연대가 기고하는 이달의 기업살인 기사는 이곳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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