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건강연대 1부_변재원
2023년 2월 24일, ‘서북권 초대형 개발 호재’라는 떠들썩한 재개발 소문을 기점으로 오랫동안 지역을 지켜온 시민단체가 한창 떠나고 있는 은평구 혁신파크를 찾아갔다. 공간은 서서히 비워지는 중이었다. 건물은 자신의 운명을 아는지 적막하고 싸늘한 공기를 내뿜고 있었다. 간간이 이삿짐센터 직원이 오가는 모습 빼고는 대체로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로비에 한참 동안 나 홀로 앉아있었다.
약속 시간에 이르렀을 때쯤 한 사람이 이곳으로 찾아왔다. 노동건강연대 전수경 활동가였다.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곳에 아무도 없었기에 그를 알아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연이은 시민단체의 퇴거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노출 콘크리트의 건물 로비에 남아있는 마지막 온기는 그의 주변에 머물렀다. 처음 만난 그는 로비 공간을 잠깐 고개저어 둘러보며 며칠 뒤 이곳을 떠날 예정이라고 말하며 로비의 빈 공간에 자리에 잡았다. 어쩌면 노동건강연대가 은평구를 떠나기 전 찾아온 마지막 손님이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이 놓인 한 모퉁이에 함께 자리를 잡았다. 그에게 연구 취지를 소개하고, 동의를 받고, 녹음기를 켰다. 인터뷰 순서와는 관계없는 첫 질문을 던졌다. 순수한 호기심에서였다. 사안 자체가 대체로 힘들고 무거운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 물었다. 전수경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전수경: 음... 글쎄요. 전 노동자와 함께 하는 운동이 너무 좋았어요. '노동자는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이고, 세상의 주인이다.'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망설임 없는 한마디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전수경 활동가는 일하는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응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타인의 땀을 마주할 때 불쾌함보다 앞서 소중함을 느끼는 활동가였다. 87년 민주화 이후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대통령을 선출하는 직선제 방식부터 인터넷과 스마트폰까지. 정치부터 과학까지 모든 게 변했지만, 그의 꿈과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우리 사회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시가 아니라 존중의 힘이라는 것을 한평생 믿어온 사람이었다.
전수경: 안녕하세요. 저는 전수경입니다. 2001년 노동건강연대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활동하고 있습니다.
나를 스쳐간 21세기는 채 열거할 수 없는 수많은 장소와 소속으로 대변되는데, 노동건강연대와 21세기를 보낸 전수경 활동가는 벌써 사반세기 가까이 노동건강연대 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노동건강연대는 일터에서 목소리를 갖기 힘든 미조직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활동을 목표했다. 구체적으로 노동조합에 조직되지 못하거나 조직할 수 없는 이들의 노동권을 최우선적으로 전담했다. 100명 중 오직 14명 정도만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저조한 수치에서 짐작할 수 있듯, 대다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저마다의 권리를 지키는 데 고군분투하고 있다. 노동건강연대는 이들의 숨겨진 목소리를 찾는 데 최선을 다했다.
카페나 편의점에서 물건을 파는 점원, 운동화나 구두를 만드는 장이,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는 청소년, 트럭을 타고 이 공장과 저 공장을 오가는 일용직 노동자, 그리고 노동자라 호명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프리랜서들까지. 크고 작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비단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못한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플랫폼 노동처럼 나날이 복잡해지는 고용구조에 놓이는 노동자들의 문제에도 주목했다. 특히 이들이 일터에서 겪는 산업재해와 건강권 문제들을 주목했다.
노동건강연대는 오랜 시간 표본 수가 적거나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디서 일을 하는지 예의주시했다. 이들은 급식실, 골프장, 심지어는 집이라는 일터에 있는 노동자들을 만났다. 노동자들이 더 이상 ‘아줌마’로 불리지 않고, ‘학교 급식 조리사’로, ‘골프장 캐디’로, ‘가사 노동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힘을 모았다. 그들의 활동 덕에 이들의 직업이 제도적으로 인정되고, 노동조합을 결성하며, 권리를 존중받을 수 있게 되었다.
수많은 청소년 ‘소희’들이 ‘노동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 것도 그들의 활동 성과의 일부였다. 영화 <다음 소희>가 유행하기 20년 전, 청소년 노동은 ‘애들’이 겪는 문제로 대다수 어른들을 둘러싼 노동권과는 무관한 주제처럼 여겨졌다. 2000년대부터 급증한 청소년 노동자들 사이의 노동착취가 유행했다. 청소년들은 ‘미성년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최저임금을 받지 못한 채 그저 참고 일해야만 했다. 어떤 사업주에게 이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애들’이었다. ‘애들’은 산업 현장 속 ‘어른’들의 빈자리를 메우는 그림자와도 같았다.
노동건강연대의 활동가들은 일반계 고등학교 졸업 후 곧장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들, 특성화 고등학교를 다니며 현장실습에 참여하던 이들의 노동사각지대를 탐색했다.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의 특성에 끊임없이 조사하고, 이해하고, 정리하는 일에 사명감을 느꼈다. 수많은 미세노동의 이름이 일일이 불러지는 동안 해당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2021년 제정된 중대재해처벌법의 최초 논의는 노동건강연대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과거, 노동건강연대 사무실 한편에서 2002년 산업재해 사망자 통계(2,605명)를 어떻게 알릴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한창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기업이 사람을 죽였다’는 문장이 터져 나왔다. 노동건강연대는 사고의 원인은 노동자가 아니라 기업에 있음을 일찍이 알아보았다. 사고는 단지 노동자 개인의 ‘부주의’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터에서의 죽음은 미숙함이나 일탈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였다.
작업 미숙, 기계 오작동 등이 주된 죽음의 이유로 인식되던 시기에 노동건강연대는 사업주가 안전한 노동 환경을 확보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대다수 기업은 이들의 경고를 무시했다. 노동자가 사망한 이후에도 대체 인력이라는 새 부품을 구해 생산 라인을 끊임없이 가동했다. 노동건강연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2006년부터 매해 최악의 살인기업을 선정하고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매스컴의 관심이 쏟아지자, 기업은 더 이상 이들의 활동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노동건강연대가 오랫동안 외쳐온 ‘기업살인법’의 구호 뒤에는 여러 갈등이 뒷따랐다. 노동조합조차 부담스러워했다. 기업살인이라는 표현을 두고, 자신이 긍지를 갖고 일하는 사업장이 악마화되는 게 아니냐며 반발했다.
전수경: 기업살인법 운동의 경우에는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당시에 노동조합 현장에서 맨날 노동자들이 죽으니까 초창기에 기업살인법이라는 말을 붙었죠. 노동조합에서는 엄청 화를 내고 막 그랬어요. 이곳은 본인들이 일하는 직장이기도 하잖아요. 노동자들로서는 아무리 전투적으로 노조 운동을 하더라도 받아들이기 힘들거든요.
그러나 노동건강연대 활동가들은 계속해서 기업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렸다. 산업재해 사망 소식이 들려오는 곳은 전국 어디라도 찾아가는 ‘불청객’을 오랫동안 자초했다. 동료를 잃어 슬퍼하는 노동자들에게 기업이 살인을 했다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죽음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라도 경영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설득했다.
사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구호는 이제 뉴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이지만, 과거에는 그런 요구가 거의 없었다. 단 열 명 남짓이 모여 있는 지방 산업재해 현장에 찾아가서도 애도와 함께 기업주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건강연대의 조문을 통한 연대는 실의에 찬 노동자들이 동료의 죽음을 마냥 슬퍼하고 마는 것으로 끝내는 대신, 산업 재해의 원인을 지적하고 관리자의 책임을 묻는 행동으로 나아가게끔 했다.
전수경 활동가는 노동자의 구호가 목소리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는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오랜 시간 기업살인법 활동을 통해 현장의 여러 노동자들이 보다 산업재해 문제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고 바라보기 시작할 때 전율을 느꼈다고 말했다. 동료를 잃어 무기력한 금속 노동자들 사이에서 경영자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할 때 그는 이루 말하기 힘든 심정을 느꼈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은 오랜 운동이 낳은 결실이었다. 비록 법제화 과정에서 ‘기업’, ‘살인’이라는 단어는 모두 삭제되고 말았지만, 구조적 차원에서 문제를 인식하는 관점만큼은 법제화됐다. 현장의 안전은 더 이상 노동자만의 부담이 아니라 관리자가 함께 짊어지는 책임이 되었다.
2016년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작업하던 노동자 김 군, 2018년 태안석탄화력발전소 석탄이송 컨베이어벨트에서 스러진 김용균, 그보다 더 앞선 2014년 세월호 참사까지. 산업재해와 국가적 재난을 목격한 시민은 더 이상 재난과 재해의 사고 원인을 한낱 개인의 탓으로 여기지 않는다.
노동건강연대는 ‘기업이 사람을 죽였다’는 대담한 문제를 정의하는 시작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해 나가려는 이들의 곁을 지키기도 했다. 1987년 산재 노동 현장에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자본의 직접적인 탄압으로 말미암아 손과 몸이 잘려 나가는 아픔을 알게 된 이들”이 모인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가 새로운 몸을 부정하지 않고 “잘린 손을 치켜들 수” 있도록 산재 노동자 자립작업장을 비롯한 일자리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전수경: 산재 노동자 협의회라고 되게 오랜 노동 운동 속에서 기억돼야 될 조직이 있어요. 지금은 그분들이 아주 극소수만 남아 있는데, 그분들을 계속 만나면서 직접 자립작업장이나 일자리등을 만들 수 있게 지원하는 일들을 오래간 진행 했죠.
디지털화가 개인화의 동의어가 되어버린 오늘날, 구로공단이 구로디지털단지로 탈바꿈하며 뿔뿔이 흩어진 노동자들이 몇 명 남지 않는 상황에서도 노동건강연대는 자활공동체의 정체성을 갖고 활동하는 이들 곁을 지켰다. 흘러간 역사 속 흘러가지 않은 사람들과 남은 자리를 지켰다.
노동건강연대는 2023년 3월 말부터 현재까지 베트남에서 핸드폰 하청노동자의 메탄올 집단중독되어 사망하고 시력을 잃은 산업재해 사고를 집중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메탄올 중독 사건은 몇 해 전 국내에서 발생했던 일이기도 했다. 삼성의 갤럭시 시리즈가 아직 한 자릿수일 때, LG가 스마트폰을 만들며 장밋빛 전망을 그릴 때, 노동건강연대는 청년 노동자의 메탄올 중독 문제를 처음 제기했다.
인천·부천지역 중심의 대기업 스마트폰 제조 하청업체에서 메탄올을 세척제로 사용한 노동자 여섯 명이 급성중독되어 시력을 잃게 된 사고였다. 양쪽 시력을 완전히 잃거나, 10% 수준만의 시력만이 남은 채로 앞을 볼 수 없게 된 노동자들은 사고 당시 한순간 잃게 된 시력이 공장에서 발생한 사고 때문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날그날 봉고차가 실어 나르는 파편화된 일회용 부품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에, 업무 후 일터의 문제를 파악하고 권리를 외칠 모든 기회로부터 단절되고 말았다. 그들처럼 일하는 사람들을 파견노동자라고 불렀다.
전수경: 봉고차가 공장으로 사람을 실어 나르면,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공장 사장이 고용한 사람이 아니고, 봉고차 사장이 고용한 사람인셈이죠. 봉고차를 타고 공장으로 실어 나르는 것이 파견인데요. 공장 사장은 이 노동자들이 누군지 잘 몰라도 일만 하면 됐고, 보호할 필요도 없고 그랬죠.
파견노동자는 곧 “공장 사장이 고용한 사람이 아니고, 봉고차에 실려 온 봉고차 사장이 고용한 사람”을 뜻했다. 이 노동자들은 회사 소속의 직원이 아니었기에, ‘부품들’처럼 다루어졌다. 사업주는 노골적인 위험에 노출시키는 데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아파서 공장에 오지 못하면, 봉고차는 다른 ‘부품들’을 또 실어 나를 것이기 때문이다.
봉고차에 태워진 이들을 사람이 아니라 부품처럼 여기는 ‘합리적인 경영 효율’의 논리가 치명적인 메탄올 용액을 고집하는 책임 없는 근거가 되었다. 인력은 라인을 따라 돌고 돌며 대체됐다. 당시 박근혜 전 정부가 목쉬어 외쳤던 기업의 자유를 보장하는 “기업 천국”은 그런 봉고차 사업을 끝없이 키워나가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결국 "평범한 삶을 살았던 이들은 누군가의 돈벌이와 정부의 무관심 속에 시력을 잃었다"(선대식, 2018)
어떻게 산업재해를 겪은 활동가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었는지 궁금한 마음이 들어 질문했다. 말이 좋아 인천·부천 한 단어로 표현되지, 어떻게 그 넓은 땅덩어리 속 서로 다른 공장에서 일하다 눈이 먼 6명의 노동자를 저마다 찾아냈냐는 물음에 전수경 활동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스스로도 신기한데 일을 하다 보면 우연히도 그렇게 확대된다고 말했다.
최초 보고된 환자는 지역 내 응급실에 실려 갔다가 우연히 노동건강연대 회원인 의사를 만났다고 한다. 산업재해 감수성이 예민한 의사는 앞이 보이지 않는 환자를 보자마자 한 명이 아닐 것 같다는 직감을 했고, 노동건강연대에 이 사실을 알렸다.
전수경: 맨 처음 시력을 잃은 환자는 응급실에 실려 갔다가 너무나 운 좋게 혹시 이 사람이 공장에 다닌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의사를 만났어요. 그 의사가 노동건강연대 회원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처음 한 명을 만날 수 있었어요.
활동가들은 그 길로 지역 안과와 노동상담소를 돌아다니며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시력이 급격히 저하되거나 앞을 볼 수 없다는 환자가 없었냐며. 대다수 관계자들도 메탄올 중독인 줄 모르고 있을 당시였다. 안 보인다며 걱정하는 사연이 한 사람, 두 사람씩 등장했다. 관련 소식이 언론을 타자 그 수는 순식간에 여섯 명까지 늘었다.
스마트폰 부품을 만들다 시력을 잃게 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어느 청년 노동자는 사장님께 앞이 안 보여 일을 못한다고 혼날까 봐 일방적으로 회사와 연락을 끊어 숨어 지내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만일 노동건강연대가 없었다면 메탄올 집단중독 문제는 산업재해가 아니라 동시에 발생한 우연한 사고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건강연대는 고립된 재난의 점들을 선으로 연결하는 활동을 계속해나갔다.
1. 정기·일시 후원 참여하기
노동건강연대는 비영리 민간단체로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어떠한 후원도 받지 않는 단체다. 오롯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후원에 기반하여 운영되는 만큼, 정기후원과 일시후원이 단체의 활동을 지속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여건을 마련한다.
노동건강연대의 후원 신청은 이곳에서 할 수 있다.
2. 기획강좌·책읽기 모임 혹은 발간 자료 읽기
노동건강연대는 필요에 따라 노동과 건강에 관한 기획강좌 및 책읽기 모임 등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거나 보고서를 발표한다. 2023년에도『4월 책읽기 모임: 실명의 이유』, 『노동건강연대 이사 기념 집들이 토크』, 『청년여성 산재회복 지원사업 보고서 발간』 등 다양한 소식을 알렸다.
노동건강연대의 지식이 담긴 다양한 결과물은 이곳에서 볼 수 있다.
3. 오마이뉴스 [이달의 기업살인] 기고 읽기
노동건강연대는 매달 오마이뉴스에 [이달의 기업살인]을 정기 기고하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이 기고의 취지는 "한 해 2000명의 노동자가 일을 하다 퇴근하지 못하는 산재공화국 대한민국의 현실 속, 매달 최소한 언론에 보도된 노동자의 죽음만이라도 한데 모아 노동자의 '조용한 죽음'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책임을 묻기 위한 밑거름을 만들기 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노동건강연대가 기고하는 이달의 기업살인 기사는 이곳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