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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시락 Jun 29. 2019

(아트 칼럼) 노트르담 대성당과 고딕 양식

화재 이후 관심이 급증한 노트르담 대성당

예술플랫폼 <아트렉처>에 연재 중인 글이다.

2019년 4월 프랑스 노틀담 성당의 화재로 프랑스인은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큰 슬픔에 잠겼었다. 첨탑이 무너지는 걸 그대로 지켜봐야 했던 사람들에게 이는 큰 충격이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우리의 일부가 불탔다.”며 “노트르담 대성당은 우리의 역사이자 문학, 정신의 일부이고 위대한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이자 우리 삶의 중심”이었다는 말로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와 함께 성당 재건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도 전했다. 또한 재건을 위한 기부 행렬도 줄을 이었다.


프랑스가 제국주의로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며 파괴했던 여러 문명을 떠올려 보면 전 세계가 슬퍼할 일은 아니라는 비웃음도 있지만, 분명 세계 문화 유산이 화재로 소실된 것은 불행한 일이다. 1163년 공사를 시작해 1345년 축성식을 열었던 파리 소재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하루 3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이 방문하는 파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이 명소이다. 특히 나폴레옹의 대관식(1804년)이 거행되었던 장소이자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1831년)의 무대이기에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가 더욱 부각되고 있다.

불 타기 이전의 노트르담 대성당 (출처 : 위키피디아)

노트르담 대성당은 샤르트르 대성당과 함께 ‘고딕’이라는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두 대성당 모두 프랑스에 위치해 있다. 다시 말해, ‘고딕’ 양식은 프랑스의 유산이고 이번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에 대한 프랑스 사람들의 반응도 더 이해가 갈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고딕’이라는 개념은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이들이 보기에 고딕 양식은 당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이 본받고자 했던 조화롭고 이상적인 고전 양식(고대 그리스의 건축 양식)과는 전혀 달랐었다. 이에 로마를 파괴했던 게르만족의 한 부족이었던 고트족의 취향처럼 천박하다는 의미를 담아 ‘고딕’(고트인스러운)으로 불렀다.


오늘날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12~15세기에 이르는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나 16세기 르네상스 시기에 지은 건축물이나 과거의 문화유산으로서 똑같은 가치를 매길 수 있다. 하지만 16세기 르네상스인들에게 시각 예술로서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매우 기괴스러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늘로 삐쭉 치솟은 첨탑이나 성당 외부에 세워진 일종의 버팀목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공중부벽(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eress)의 형태는 마치 골격이 드러난 괴물같은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과 관계없이 이탈리아 흐네상스인들이 그저 프랑스의 문화를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붙인 이름일 수 있다.

도면이나 하늘에서 내려다본 노트르담 성당을 보면 마치 박물관에 전시된 뼈대만 남은 공룡처럼 보일 수 있다. (출처 : 연합뉴스)

그런데, 바로 이 공중부벽(버팀도리, 공중버팀벽, 비량 등으로 부른다)이 바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을 가능하게 하였다. 고딕 형태의 건축물은 첨형 아치(위로 삐죽한 아치 형태)인데, 아치가 높다 보니 기둥으로 그 하중이 쏠리는 구조이다. 이 하중을 분산시키면서 바깥쪽으로 무너질 수 있는 건물의 균형을 잡아주는 장치가 바로 외부의 버팀목인 공중부벽이다. 그리고 늑재(리브rib, 늑재, 즉 갈비뼈 형태의 구조물)를 사용했기 때문에, 궁륭(아치 형태의 천장) 건축에 반드시 필요했던 두꺼운 석재벽이 사라지면서 단순하지만 실용성 있는 건축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건축 기술의 발달로 가능했던 고딕 양식의 대성당은 그에 따른 부가적이지만 종교와 예술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높은 아치 형태의 건물을 지으면 그에 따라 내부가 훨씬 밝아지고 환기가 좋아지는데 이는 대성당에 들어오는 이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안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황홀한 기분을 안길 수 있었다. 늑재와 공중부벽 덕택에 건물을 가득 메운 두꺼운 석재벽 대신에 얇고 가느다란 기둥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꺼운 석재벽이 사라진 공간을 고딕 대성당을 대표하는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하였다. 이 색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예배를 보기 위해 들른 많은 중세인들에게 영광의 빛을 선사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유명한 장미창. (출처 : 중앙일보)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이 유행하며 유리 세공업도 더불어 발전할 수 있었다.

고딕 양식의 대성당은 중세의 ‘마천루'로서 첨단기술의 집약체이자 중세 도시의 상징물이었다. 이는 중세 도시인들에게도 하나의 자랑이자 기쁨이었을 것이다.  건물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정밀한 계산이 필요했고, 이를 실현 가능하게 해 줄 기술자들도 필요했다. 무엇보다 돈이 드는 일이었다. 중세 도시의 발달로 상공업자가 등장하고 이에 따른 경제적 성장이 이를 촉진하였다. 도시와 도시인들은 중세를 벗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이렇게 대성당은 분명 기독교라는 종교가 지배했던 중세 시대의 중요한 건축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중세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변화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노트르담 대성당 재건에 관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첨탑을 다른 건물로 대체하거나 첨탑이 설치된 지붕을 개조하지는 등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재건이란 단지 건축물을 새로 짓는 것뿐만 아니라 그 건축물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의미 또한 되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노트르담 대성당 화제로 많은 이들이 슬퍼했던 이유는 돌이킬 수 없는 문화재의 손실만큼이나 그 성당에 얽힌 사건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건설된지 800년이 지난 노트르담 대성당이 앞으로 800년 이후에 어떻게 기억될지는 현재의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 미래가 궁금한 오늘이다.

머릿속을 정리하다 낙서로 해본 스케치다. 물론 내 안에 담긴 이미지다 보니 실제 노트르담 성당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영상으로 이해하는 노트르담 대성당과 고딕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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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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