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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시락 Sep 02. 2019

(아트 칼럼) 낙서와 그래피티 그리고 선물 가게

낙서를 바라보듯 예술을 바라볼 수 있는 시대를 그리며

예술플랫폼 <아트렉처> 연재 중인 글이다.

누구나 한 번쯤 낙서를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겨운 수업을 듣다가 책을 읽다가 또는 너무나 지저분해서 낙서를 더한다 해도 깔끔해지지 않을 버려진 빈 터를 마주칠 때, 오히려 정말 잘 정돈되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남의 담벼락을 볼 때, 무엇보다 집안의 벽지나 노트의 여백이나 책상의 모서리와 마주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낀다. 그 중에서도 최고는 깁스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다정다감한 낙서가 펼쳐지는, 그야말로 낙서의 성지이다.

깁스 낙서의 최고봉 (출처 : jtbc)


어릴 때의 낙서는 대개 “OOO 바보”, “OOO 사랑”과 같이 유치하기 짝이 없을 때가 많다. 물론 나이가 든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금 더 숨기거나 아예 드러내놓을 뿐이아. 낙서에는 개인적인 마음, 소망, 욕망 또는 기쁨, 슬픔, 그리고 이런 것들을 포함한 의식과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하는 사람은 알아볼 수 있으나 보는 사람은 알 수 없는, 그야말로 별 뜻 없이 아무 데나 휘갈기는 행위인 경우가 많다. 더욱이 손가는대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도 그림도 아닌 이상한 기호들을 그릴 때도 있어 더더욱 알아보기 힘들다.


또한 낙서는 단지 개인의 마음이나 무의식 또는 욕망을 나타내는 것을 넘어 사회 문제나 정치 비판과 같이 공적인 문제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고려 말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목자지왕’이라는 네 글자를 나뭇잎에 새겨 사람들을 선동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木’자와 ‘子’자를 합치면 ‘李’씨 성이 된다). 이것 역시 낙서의 일종이다. 한편, 조선 후기 보부상들은 그들이 자주 지나는 길목 바위나 돌에 낙서를 하여 서로 중요한 정보를 공유했다고 한다. 남에게는 낙서, 나에게는 정보가 될 수 있는 표현 방식이 또한 낙서이다.


언제부터 낙서가 시작되었는지는 모르나, 아마 인류가 어떤 기호로든 의사소통이 가능한 능력이 생기고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현대에 들어 낙서는 ‘그래피티’라는 이름으로 예술의 한 분야가 되었다(물론 서양에서). 그라피티는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graffito'에서 유래했으며, 고대의 동굴벽화, 이집트의 상형문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래피티는 1960년대 후반 뉴욕 브롱스 흑인들을 중심으로 건물 벽이나 지하철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인종 차별이나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뉴욕 브롱스의 거리 벽화 (구글 이미지)


왜 미국 뉴욕의 흑인들로부터 시작되었을까? 세상에 가장 흔하면서 값싼 캔버스가 담벼락이고 지하철이다. 그리고 가장 구하기도 쉽고 값싼 물감이자 붓이 바로 스프레이 페인트이다. 만일 당시 미국 흑인들에게 그림을 그릴 캔버스와 물감이 주어졌다면? 그리고 정규교육을 받을 수 있는 중산층이었거나 누군가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이 있었다면? 과연 그들이 불법을 저지르며 건물 벽이나 지하철에 낙서를 했을까? 그런 위험을 감수했을까? 이처럼 낙서는 불만과 결핍, 반항과 저항으로부터 시작된 기존의 문화를 뒤엎고 거부하는 반문화의 하나였다.


그렇지만 이 하위문화가 대중문화의 하나로 받아들여질 때에는 그 파급력이 막강해질 수 있다. 흑인의 힙합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하나의 예술로 자리잡은 그래피티는 1980년대를 거치며 뒷골목 어디엔가 비밀리에 하던 낙서의 지위를 벗어던지며 거리의 예술로 당당히 자리잡았다. 그뿐 아니라 담벼락에서 캔버스로, 캔버스를 넘어 개인의 취향을 담고 상품의 브랜드를 대표하며 기존의 예술과 결합하여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키스 해링이나 장 미셸 바스키아 같은 작가들은 이런 낙서를 이용하여 자기의 예술 세계를 구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그래피티 디자인 제품 (구글 이미지)


반면, 부정적인 영향도 있었다. 바로 저항과 비판 기능의 상실이었다. 돈벌이가 된다는 건 달리 말해 사회에 대한 저항과 비판과는 멀어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런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현대에 낙서로 한 획을 그은 사람이 있다. 바로 뱅크시이다. ‘얼굴 없는 예술가’로 알려진 그는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긴 채 활동하고 있다. 세계 곳곳을 무대로 전쟁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는 풍자적인 그림을 남기며 활동하는 중이다. 그래서 뱅크시를 ‘예술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재미난 것은 이런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뱅크시의 작품이 매우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허물어져가는 동네 담벼락에 그린 그의 그림은 그 집주인에겐 로또나 다름없다. 이에 담벼락 그림을 지키기 위해 경호원을 고용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백미는 2018년 10월 영국 소더비 경매에 나온 <풍선과 소녀>라는 작품이다. 무려 104만 파운드(약 14억 원)에 판매된 이 그림은 낙찰된 순간 액자 틀에 숨겨진 소형 분쇄 장치가 가동되면서 그림의 절반이 파쇄기에 잘린 듯 가늘게 잘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역시 뱅크시의 퍼포먼스로 밝혀지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남았다.

뱅크시의 작품 <풍선과 소녀>


영화 감독이기도 한 뱅크시는 2010년 자신의 작업 과정과 인터뷰를 담은 영화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에서 지나치게 상업화된 예술산업과 예술에 대한 허영과 사치를 조롱하였다.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라는 제목은 말 그대로 대형전시관에서 전시를 마치고 나오면 꼭 들르게 되는 선물 가게를 풍자하는 의미이다. 뱅크시는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성격을 가졌던 낙서가 어느 순간 예술의 지위를 얻고 그 예술이 다시 상품으로 변하는 것이 갖는 과정을 보여주며 사람들이 ‘예술’ 앞에서 작아지고 ‘예술’이 그저 ‘금전적 가치’로 바뀌는 세상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뱅크시가 아무리 세상을 비웃고 비판한다 하더라도 그의 작품을 예술로 바라보고,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대에 들어 예술 시장은 더욱더 커져가고 있다. 게다가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는 현대 미술의 특성상 어떤 것이든 ‘예술’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씌어 상품으로 둔갑시킬 수도 있다. 이를 비극적으로 봐라보야 할지 낙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할지 그 판단조차 어렵다. 어쩌면 예술은 이제 ’예술’이 갖는 ‘예술적’ 가치와 ‘상업적 가치’를 따로 매길 수 없는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예술을 관람하는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앞으로도 예술이 소장의 대상보다는 영감과 낭만을 안겨주는 매개체로 남아있기를 바랄 것이다. 이는 낙서를 끄적일 때 느끼는 작은 희열과 자기 충족과 같은 소소함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낙서를 바라보듯 예술을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면 소박한 내 마음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일년에 한 번 정도는 전시 관람을 끝내고 나온 선물 가게 앞에 서서 한 번쯤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정말 내가 누리는 이 모든 것이 돈 없이 가능했을지. 그리고 이곳에서 내가 진정 무엇을 얻고자 했을지.


예술, 인간 이상을 향한 진격
by 김바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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