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한 감상, 그리고 두 편의 영화
예술을 위한 공간 <Aㅏ트>매거진
이 글은 예술플랫폼 아트렉처에도 실렸다.
후-드-드-득. 대지를 강타하는 빗소리에 모든 것이 고요해지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빗줄기는 그 자체로 요란한 울림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 요란함은 대기의 소리를 잡아먹은 채 한동안 커다란 진공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것은 어쩌면 고요함을 향하는 내 마음일 수도 있다. 또, 어쩌면 비와 내 마음이 함께 만들어내는 작은 오케스트라일 수도 있지. 연주는 하지만 소리는 내지 않는, 소리는 내지만 음악은 없는 그런 무언의 오케스트라.
류이치 사카모토의 <async>(2017)라는 음반이 그렇다. 이 음반 속에 담겨있는 14곡의 음악을 들어보면 비가 만들어내는 그 진공을, 그리고 그 진공 속에 잠겨있는 나 자신과 그 진공을 감싸고 있는 이 지구와 우주를 경험할 수 있다. 너무나 거창해서 믿기 힘들겠지만 그의 음악은 비동시성, 소수, 혼돈, 양자물리학, 인생무상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도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이런 의미에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async>를 '생각을 담은 음악'으로 정의하고 싶다.
adanta: 장엄하게,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듯, 그리고 죽음보단 삶을 향해
(1번째 곡 - 나의 감상)
음반의 제목인 'async'는 '비동기화'를 뜻한다. 동기화를 뜻하는 sync의 사전적 의미는 "작업들 사이의 수행 시기를 맞추는 것.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거나,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어나도록 시간의 간격을 조정하는 것을 이른다." 스마트폰의 자료를 클라우드의 내용과 일치시키거나 영상과 음성을 일치시키거나 노래와 입모양을 일치시키는 것 또한 '동기화'이다. 비동기화란 그 반대이다. 동시성도 지속성도 일치성도 없는 상태.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이 그렇다.
무엇보다 그는 특별한 방식으로 연주를 한다. 피아노를 예로 든다면 보통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 연주를 한다. 하지만 류이치 사키모토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대신 피아노 현을 긁거나 튕기는 방식으로 피아노가 가진 음을 색다르게 드러낸다. 또한 자신이 직접 녹음한 세상의 소리를 다양한 형태로 변주하며 그것을 하나의 악기로 활용한다. 음을 내기보다는 음을 다룬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매우 실험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음악(현대적 음악)이라 할 수 있다.
wlker: 낙엽 밟는 소리, 산책하는 동안 깊어지는 사색의 느낌을 담아
(3번째 곡 - 나의 감상)
가만히 관찰해 보면 각각의 존재엔 그것만의 파장이 있고 절대 똑같지 않다. 나무는 나무대로, 돌은 돌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고래는 고래대로, 상어는 상어대로, 꽃은 꽃대로, 흙은 흙대로, 그리고 인간은 인간대로, 또 각각의 사람은 그 사람대로. 각자가 지닌 독특한 파장을 음으로 표현하면 어떨까. 그리고 그것을 악기가 아닌 컴퓨터로 만들어낸다면. 그렇게 만든 음들이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서로 조화되는 그런 음악은 어떤 모습일까.
류이치 사카모토는 이런 고민을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우선 가볍게 그의 음악을 구경해 보자.
• Ryuichi Sakamoto <async> album preview
사람마다 다를 테나, 처음 이 음악을 듣는 순간의 느낌은 이럴 것이다. 이것이 음악인가? 당황스럽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어떻게 들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음악에 대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리듬도 멜로디도 없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의 반복, 간간히 들리는 피아노 소리, 불규칙적으로 울려퍼지는 인위적인 전자음. 실제로 음악이라기보다는 '음향'에 가깝다. 음향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음향에 좀더 민감한 사람이라면 <async>를 훨씬 잘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두 편의 영화를 보면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조금 더 이해하고 좀 더 나은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async>를 연주한 콘서트를 담은 영화인 <류이치 사카모토: 에이싱크>(2017)이다. 단 200명만을 초대한 공연으로 천장에 띄운 대형 스크린을 통해 그의 음악이 갖는 이미지를 영상으로 내보내고 있어 <async>가 어떤 음반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async>가 어떻게 탄생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는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2018)이다. 여기에서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일상과 그의 음악 세계, 그리고 <async> 음반을 만드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async>를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된다.
ubi: 까마득한 우주으로부터 희미하게 들려오는, 심장 박동처럼 울려퍼지는
(5번째 곡 - 나의 감상)
류이치 사카모토는 <마지막 황제>와 <레버넌트>의 영화음악을 만든 음악가이다. 아시아 최초의 골든글로브, 그래미, 아카데미, 영국 아카데미를 모두 거머쥔 음악가이다. 한국 영화 <남한산성>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영화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탈핵운동가이기도 하다. 평화가 없는 곳엔 음악이 없다는 그의 신념에서 그의 음악 역시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들게 한다. 무엇보다 처음엔 낯설지만 반복해 들어보면 조금씩 더 좋아진다. 오랜 시간 공들여 빚어낸 조각 같은 음반이므로.
하나 아쉬운 것은 이 음반의 음악들을 라이브 연주로 들어보긴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이다. 오로지 류이치 사카모토만이 이 특별한 음들을 재생해낼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보다 더 뛰어난 누군가가 있다면 모를까. 이런 의미에서 <async>는 음악을 사랑하는 감상자들이 아니라 본인을 위해 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몰라줘도 나에게 끝내주면 그만이야!’와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실제 작업을 마무리하고 한동안 음반을 공개하지 않은 채 혼자 들었다고 한다.이제 이 음반을 감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과 그 해설을 들어볼 수 있는 공연 정보도 덧붙인다. ‘더 라움 the raum’ 10월 공연, <영화 속 현대 음악, 류이치 사카모토>이다. 다만 공연 정보로 추측컨대 <async>를 들을 순 없을 것 같다.
예술, 인간 이상을 위한 진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