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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시락 Feb 02. 2022

(아트 칼럼) 권지안(솔비)과 예술 시장

예술가와 아티스트 사이에서


권지안의 작품이 아트 페어에서 호평을 받은 것을 두고 말이 많다. 화가라는 직업으로 작품활동을 계속해나가는 권지안도, 그의 작품이 고가에 판매되는 것도 논란이다. 어찌 보면 이 문제는 간단하다. 본인 스스로 더 이상 작가도 화가도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연예인도 있고 그 작품이 고가에 판매되는 일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그렇다. 붓질 하나 제대로 배우지 않은 채 남의 아이디어를 모방하여 쉽게 작업을 하는 사람을 두고 어찌 작가라 부를 수 있을까. 더욱이 연예인이라는 과거 경력을 이용하여 인기몰이를 하고, 그 인기에 힘입어 작가가 된 것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욱이 아트 페어에서의 호평이라니. 평생 그림을 그리겠다고, 그림에 인생을 걸고 온 사람들에게 권지안이 화가로 대접받는 이 상황은 ‘현타’를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아트 페어’란 ‘예술 작품 판매 시장’이다. 이곳은 철저히 시장 논리를 따른다. 아트 페어는 대개 갤러리에서 나오고, 갤러리는 작품 판매자이다. 갤러리에서 원하는 것은 고매한 예술품이  아니라 시장성이 있는 예술품이다. 작품을 구매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작품성이든 상품성이든 그것이 ‘구매 가치’를 지니면 된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이 작품이, 이 상품이 어떤 식으로든 가치를 가진다는데. 그리고 값이 나간다는데.

커진 한국의 예술 시장

전통적으로 예술이라 부른다면 작가가 작품에 영혼이라도 갈아넣을 정도의 정성이 있어야 하고, 감상자는 그것으로부터 감동이든 숭고함이든 일종의 미적 체험이 가능해야 한다고 믿음이 있어왔다. 그렇지만 현대 예술이 어디 그러한가. 대체 영혼과 감동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게다가 아트 페어 전문 작가들도 있다. 그들은 판매를 위해 작품을 ‘생산’해 내고 트렌드를 따라 작품의 방향을 수시로 바꾸기도 한다. 이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현대 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본주의와의 연결이다. 한국의 예술 시장 규모가 커지고 고 김환기 작가와 같이 한국 작가들의 작품이 점차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면서, 한국에서도 자본이 예술을 삼키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권지안은 꽤 이목을 끌만한 요소를 갖췄다. 권지안의 작품이 작품성이 없다 가정하더라도 상품성은 무궁무진할 수 있다. 시쳇말로 팔리고, 팔릴 수 있다면, 없는 작품성도 만들어낼 수 있다.


더욱이 현대 미술은 퍼포먼스와 디지털, LED와 뇌파 등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나 작품을 만드는 방식, 그리고 감상의 방식도 그 이전과는 완연히 달라졌다. 캔버스에 ‘바나나’를 하나 걸어두고도 ‘예술’이라 하면 예술이 되는 세상이다. 표절이 아니라면, 이를 넘어 신선하고 독창적이라면, 촛불을 녹이는 방식으로 회화를 구성하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질 않는다. 오히려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것 역시 현대 미술이니까.

예술가와 아티스트 사이

최근 들어 많은 아이돌 가수들을 ‘아티스트’라 지칭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을 기존의 기념대로 ‘예술가’라 부르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예술’을 지칭하던 ‘작가의 영혼’과 ‘작품의 숭고함’, ‘감상자의 감동’ 같은 것들이 그들에겐 없다. 현대의 ‘아티스트’들은 그런 것 대신 ‘함께 놀 수 있는 것’, ‘즐길 수 있는 것’, 그리고 ‘소비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한다. 그런 것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그것이 문화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이러한 아티스트가 갖는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예술가’들의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을 수도 있다. 그들도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무엇보다 창의적이며, 가장 먼저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아티스트의 측면에 비추어 볼 때 권지안은 예술가와 아티스트 그 사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작가이길 원하지만 화가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고, 순수하게 작품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작품 판매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자격은 누가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권지안이 앞으로도 진짜 화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만의 해석으로 작품 활동을 지속한다면, 어느 순간 ‘비판은 자연스레 수그러들 것이다. 한편으로 기존의 예술가들은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잘 팔리는 것’이 ‘예술적인 것’도 ‘예술적인 것’이 ‘잘 팔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 딜레마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무언가를 해야만 자신의 영역을 굳건히 지켜낼 수 있을 테니까.


예술은 공감이다 - in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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