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만들어내는 허무맹랑한 믿음
과학적으로 세계를 파악하여 올바른 지식을 형성하려 했던 베이컨은 '인간의 잘못된 인식'이 가장 큰 방해물이라고 보았다. 이를 우상(idola)라고 명명했다. ‘우상’이란 ‘신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나 사람’을 가리는데,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대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베이컨이 제시한 네 가지 우상 중 첫번째인 '종족의 우상'을 통해 인간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어떤 사물을 탐구하거나 어떤 존재를 대할 때 인간은 ‘인간’이라는 생물적 특징이나 집단적 특성에 알게모르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면, 인간이란 존재는 그리 합리적이지도 않고 감정적일 때도 많다. 인간의 감정이 부정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인간이 세상을 받아들일 때 갖게 되는 희망이랄지 공포, 또는 편견이나 초조와 같은 것들이 사물의 참다운 본질을 인식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된다는 의미이다.
특히 '종족의 우상(idola tribus)'이란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두거나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거짓된 믿음을 가리킨다. 인간이 세계에 대해 정확히 알고자 한다면 그 탐구자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제외한 채 사물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로부터 비롯된 잘못된 믿음이 올바른 지식에 방해를 주는 것이다. ‘종족’, 다시 말해 ‘인간’ 자체가 하나의 오류 가능성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종족의 우상 = 인간이 '만물의 척도'
자기 중심적인 인간
현대 사회에 들어서는 과학의 탐구 방법과 도구가 매우 발전했기 때문에 인간이 가진 이성과 감각의 한계를 넘어서는 발견을 하고 이론을 만들 수 있다. 현미경이나 천체망원경, 컴퓨터와 같은 과학의 도구들이 인간이 가진 오류 가능성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조차 거대 우주를 탐구하기엔 너무나 너무나 미미하지만) 베이컨 당시에는 변변한 망원경 하나 없었고 과학의 수준 또한 낮았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인간은 바다에 거대 괴물이 살고 있고, 지구는 평평하며(최근에 이러한 주장이 다시 제기되고 있지만), 깊은 산속에 신선이 살고 있고, 신이 사는 동네가 따로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자연 현상에 두려움도 있었다. 유럽인들이 지구 정복기라 할 수 있는 대항해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의 인식은 크게 확장되었다. 새로운 자연 및 인문 현상을 발견하면서 자신들의 지식과 문명을 돌아볼 수 있었고 이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자극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인간 사회는 '무지'할 뿐 아니라 때론 막무가내이기도 했다. 서양에서 벌어졌던 희대의 사건 중 하나인 '마녀 사냥' 또한 '종족의 우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회에 만연한 불안과 타인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세상에서 '마녀'에게 모든 원인을 돌린 것이다. 사실 죽여야 할 대상은 마녀가 아니라 그 마녀를 우상으로 만든 인간 자신이다. 물론 잘못된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사회 분위기도 있었다.
게다가 유럽 이외의 여러 민족과 문화를 자신들보다 천박하다 여기는 문화 차별과 인종 차별도 있었다. 지금이라도 딱히 달라진 것은 아니다. 어떤 특정 집단이 자신들이 하는 일이나 생각이 다 옳다고 여기거나 그들이 믿는 것은 다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이고, 그 집단이 독단을 주장할 때 사회적 비극은 시작된다. 비록 거짓이더라도 여러 사람이 공유하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진실이라 여겨 그에 대한 비판과 의심에 대해 가차 없는 비난을 가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 개인들이 모여 불합리한 믿음을 만들어내고 이를 사실이라 여기는 한 무리의 종족이 탄생한다. 때론 거짓인 줄 알면서 스스로 기만하는 동물이 인간이다. 근거 없는 믿음은 스스로 키운 것임에도, 남들도 다 그렇다 말하는 것은 자기 행동에 대해 책임 지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에 불과하다. 범법을 저지르고 몰랐다고 해도 죄는 죄이다. 마녀 사냥 역시 이러한 인간의 행동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다들 알겠지만, 이것이 '인간'이다.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들과
인간이기에 참아야 하는 것들
한편으로, 지구엔 인간 이외에도 정말 많은 존재가 살아가고 있지만, 인간은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한다. 무엇보다 인간을 가장 가치있는 존재로 여기기도 한다. 어쩌면 당연해 보이지만 달리 보면 그리 당연하지 않다. 지구와 동물을 보호하는 일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구와 동물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려는 노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몇 백 년 전만 하더라도 '반려 동물'이란 개념이나 '보호 생물'이란 개념이 없었다.
'인간 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특히 인간은 무책임한 행동을 자주 한다.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 본인의 책임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렇게 믿었던' 사람은 본인이었고 '그렇게' 믿었던 것도 본인인데 말이다. 자기의 믿음이 거짓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렵지만 한편으로 자기를 합리화하거나 자기와 타협하려 들기 때문에 올바른 믿음을 갖기란 어렵다. 그래서 늘, '나의 믿음이 올바른지'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인간이란 종족이 가진 우상을 파괴하여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자 했던 베이컨의 기획처럼 나의 앎이 허울뿐인 믿음은 아닌지 철저한 점검이 필요하다. 인간이기에, 맹목적일 수 있고 무책임할 수 있다. 때론 폭력적이고 파괴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이기에,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의문을 품을 수 있고, 인간이기에,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런 인간만이 우상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다. 베이컨처럼 그런 가능성에 도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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