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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시락 Oct 25. 2022

그것만이 내 세상인 사람들에게

개인의 잘못된 신념이 불러오는 무서운 결과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는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을 쉽게 놓치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살아와도 잘 살아왔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도 큰 문제가 없었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도 괜찮을 것이라 여긴다.  대체로 사람들은 각자 살아오면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내린 여러 가지 결론들을 바탕에 두어 삶의 기준들을 세운다. 또한 그 기준에 따라 생각과 행동을 하며 시행착오를 겪으며 얻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자기 기준이 가진 오류를 수정한다.


문제는 자기의 결론이나 기준이 늘 통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늘 통용되는 것을 '보편성'이라 부르는데, '보편적'이다 말하는 것은  엄밀하게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참일 수 있는 사실들을 가리킨다. 사실 아무리 오랜 경험과 연륜을 쌓는다 하더라도 한  개인이 가진 믿음과 견해가 보편성을 가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기의 그름과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설령 그것을 안다 해도 고치거나 보완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베이컨이 말한 종족의 우상에 이어 두 번째 우상인 '동굴의 우상'에 대해 생각해 보자. '동굴의 우상(idola specus)'이란 개인이 가진 편애와 혐오, 아니면 관습과 속견 등 각자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관념이나 스스로 따르는 지적 권위 등을 가리킨다. 인간이 세계에 대해 정확히 알고자 한다면 그 탐구자는 자신이 한 '개인'으로서 주관적이고 특수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간단히 말해, ‘니가 세상의 중심은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동굴의 우상
= 개인의 편견과 주장


플라톤은 인간은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죄수처럼 발이 묶여 동굴 안쪽을 바라보고 있다고 보았다. 동굴 안쪽 벽면에는 동굴 바깥에 위치한 태양의 빛에 비친 '이데아(Idea)의 그림자 '가 비추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진짜' 또는 '진실'이라 여긴다. 고개를 돌려 사슬을 끊고 동굴을 빠져 나와야 그곳에 이데아, 즉 세계의 진실과 만물의 본질을 담은 진짜 세상이 펼쳐진다. 자기의 입장에서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잘못된 인간의 인식이 바로 '동굴'에 해당한다.


동굴의 우상은 동굴의 우상과 달리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나 살짝 다르다. 잘못된 믿음을 특정한 개개인이 모여 모둠을 이루고 그런 모둠이 모이면 하나의 '세력'이 된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그 사람들이 갖는 사회적 힘이 커지고 그것은 그대로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권력화 또는 세력화 된 이후에 이에 기대어 더 파렴치한 행동을 하게 될 때이다. 개개인의 잘못된 믿음이 어느새 수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믿음'이 되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최근 들어 등장한 혐오의 문제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혐오의 문제는 자신의 입장이 옳다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에  반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을 비웃고 사회적으로 배제하며 나아가 언어적이고 신체적 폭력을 가하는 데에까지 나아가서 매우 심각한  사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타인의 관점과 방식 또는 타인의 상황과 타인 그 자체를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나치의 행동과 그 정도만 달랐지 본질은 다르지 않다.


내가 옳다 여기고 바르다 여기는 믿음들을 따져보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들이나 스스로 의심해보지 않은 채 교육 받아온 관념들이 많다. 나의 관점이 너무 편협하지는 않은지, 나의 사고와 행동 방식에 부족함은 없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뭐 어쩌라고' 또는 '니가 먼데?'라는 말이 너무나 당당한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제기를 하는 상대방도 똑같이 되물을 수 있다. 내 지적에 니가 왜? 자기 식대로 사는 것을 막 사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내가 옳으면 다 옳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


인간이라면, 그리고 생각할 수 있다면 '자기만'의 방식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용인할 수 있는 만한 방식으로 삶의 기준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개인주의가 너무나 개인적으로 사용되다 보니 선뜻 타인에게 도덕적 원칙을 들이대는 것이 간섭으로 느껴지고, 서로 간에 도덕적 평가를 내리는 것이 주제 넘게 보이는 요상한 세상이라 더욱 그렇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것도 문제이만 잘 모르면서 안다고 믿는 것이 더 위험하다.


개다가 옳고 그름의 문제 역시 그저 가치관의 충돌로 여긴다는 점에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말 구분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옳고 그른 것은 있다. 법적으로 잘못이 없다고 양심의 잘못도 안 가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그 사람은 그렇게 여길지 모른다며 오히려 상대를 비난하는 행태도 나타난다. 정말 몰라서가 아니라, 상대의 잘못된 이해로 모든 원인을 돌리는 태도이다. 그렇게 본인만 떳떳하고 모든 도덕은 수면 아래에 가라앉는다.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는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주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관대'할 때가 있다. 그러나 '생각하는 인간'은 관대하기 보다 차라리 '엄격'하고자 한다. 물론 엄격하게 산다고 해서 잘먹고 잘 사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엄격하게 사는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회도 아니다. 그렇지만 미디어에 나타나는 것과 다르게 사람들은 그런 엄격함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들이 필요한 사회이기도 하다.


*블로그 바스락(홈피)

https://www.basol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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