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죽어가는 일
석가모니가 ‘사람 산다는 게 그대로 고통’이라 했는데, 별 걱정 없이 살다 별 고통 없이 죽는 것은 정말 어렵다. 신선이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삶이 애써도 잘 살기 어려운데, 죽을 때까지 애쓰며 살아야 한다는 게 가끔은 끔찍해지는 요즘이다. 죽음 앞에 자유로운 인간은 없고 누구나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죽기 전에 해 보고 싶은 거 다 해보자며 가끔 무언가를 ‘지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거스를 수는 없다.
프랑스 국적의 거장 감독 중 하나인 장뤼크 고다르가 2022년 91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스위에서 조력자살을 통해 죽음을 맞이했는데, 조력자살의 주체는 의료진이 아닌 환자 본인이다. 조력자살의 경우 의료진이 약물 처방을 도와주기는 하지만 환자 스스로 약물을 복용 또는 투약하기 때문이다. 이는 환자의 요청으로 의료진이 환자에게 직접 약물을 주입하는 안락사와 다르다.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들은 죽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병에 걸려 극도의 통증을 겪는 사람들에게 하루하루의 삶은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고통스럽다. 아니면 노화와 질병으로 더 이상 자신이 원하는 삶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더 이상의 치료가 힘에 부칠 때 사람들은 죽음을 선택한다.
최근 들어, 안락사 문제가 계속 거론되는 이유는 ‘아름다운 죽음’에 있다. 곧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의 행사이다. 장뤼크 고다르는 스위스 근처 국가인 프랑스에 살고, 그나마 조력자살을 할 수 있는 돈이라도 있어, 나름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지만 보통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가지기 어렵다.
아름다운 죽음 그리고 웰다잉
잘 살다 잘 죽기
동양에서 인간의 오복(五福)으로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을 꼽는데, 이번엔 그 중 하나인 고종명, 즉 삶을 잘 마무리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요즘 말로 풀면 웰다잉이라 할 수 있다. 잘 죽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질문에서 웰빙잉이 시작되었고, 어떻게 죽어야 할까? 라는 물음에서 웰다잉이 출발하였다. 어떻게 죽는가? 라는 질문에 이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포함되어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잘 사는 건 뭐고 잘 죽는 건 뭔지 그 해답을 찾기는 어려운 법이다. 살다 보면 '이만하면' 이라는 기준을 내세운다. 이만하면 나 잘 살았어, 이만하면 괜찮아, 그렇게 삶의 만족도를 평가하지만 늘 만족스럽진 않다.
물론 웰다잉을 거부하고 영생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다. 디즈니 만화를 제작하고 디즈니랜드를 만든 디즈니는 다시 태어나고자 자신을 꽁꽁 얼려 냉동인간 상태로 죽어 있다. 언젠가 기술이 발전하면 다시 태어날 것이라 믿으며. 냉동인간 상태로 ‘죽어 있는’ 사람들도 꽤 많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다시 태어날 용기도 있어야 한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 정말 좋은 일일지는 따져봐야 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지만 정말 개똥밭에 구른다면 이승이 나을까? 새로 태어났을 때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 죽기 전보다 더 나을지는 알 수 없다. 예상치 못한 고통을 마주한다면 그런 확신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
먼 미래에 죽음이 더 이상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 ‘질병’으로 기록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또한 먼 미래에도 이 '죽음의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냉동인간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소수일지 모른다.
어떻게 죽을까?
잘 죽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논의
나이가 들어 죽음에 가까워오면 인간은 자기 삶을 돌아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마음 편히 살아가길 바란다. 죽는 것은 즐겁기보다는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잘 살기 위해 애쓰다 어느 순간 갑자기 잘 죽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픈 일일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걱정 없이 고통 없이 살다 죽는다면 엄청난 복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는 자신의 아내가 죽었을 때 슬퍼하기보다는 북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아내가 죽어서 재산을 다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즐거웠던 것이 아니다. 세상이 그렇다보니 어느 누군가는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장자는 죽음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이었다. 인생의 ‘자연스러운 일’ 중 하나로.
인생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하고 어쩌다 일어나는 일에 대응해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해도 엇나가는 게 인생이지만. 내 맘대로 되는 세상도 아니고, 내 맘대로 살 수도 없으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지 반성하고 더 나은 삶의 모습을 강구해 보라는 의미에서 '고(考)'자를 붙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사회적으로도 공개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대화를 통해 죽음을 '곁'에 둘 수 있는 시대여야 한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죽어가는 길’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대해. 또한 ‘죽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블로그 바스락(홈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