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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뽀시락 Oct 27. 2022

베풀며 살아가기

공존과 공생을 위해


어른들이  자주 하는 말씀 중 하나가 덕을 베풀고 살라는 말이다. 덕을 베풀어야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렇다면 한 번 되물을 수 있다. 왜? 왜 덕을 베풀어야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을까? "좋은 세상이 되면 그 덕이 자기에게 돌아온다."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넘어서는 경우도 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 없이도 베푸는 것이 ‘진정한 베품’이다.


동양에서 인간의 오복(五福)으로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을 꼽는다. 오늘은 그 중 하나인 유호덕, 즉 덕을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덕이라는 말을 현대적으로 풀이하자면 '좋음' 또는 '탁월함'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자기에게 주어진 좋은 것 또는 탁월한 것들을 남들에게 또는 세상에 베풀고 살라는 것이 유호덕의 의미이다.


불경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불경 중 하나인 <금강경>에는 ‘무주상 보시’라는 말이 있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보시'라는 의미로 현대어로 풀이하면, ‘집착 없이 베풀기’라 할 수 있다. 내 가진 것의 값어치를 따지거나 자기가 베푸는 것이 배푸는 대상에게 얼마의 덕이 될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베푼다는 마음 없이 베풀기 때문에 어느 것에도 집착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베풀 수 있다. 진정 종교적  마음이다.


왜 베풀어야 할까?
어떻게 베풀어야 할까?


불경에까지 가지 않더라도 동양의 기본적인 사상 중 하나는 베품이다. 한국의 ‘정’ 문화도 여기에 기대 있다. 서로가 돕고 나누는 것 자체가 베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각박한 세상이라 베품도 점차 사라지고 사람의 마음도 덩달아 인색해지고 있다. 덕을 베푸는 사람은 드물고 흔히 말하는 인간적인 사회가 실현되는 것도 힘들기만 하다. 곁에 있는 인간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이 어렵다 보니 불신이 팽배한 세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대다수의 종교들은 이 불신을 이겨내기 위해 '영원의 시간'과 '무한의 공간'을 설정하기도 한다.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온 세상에' 라는 말들이 가진 보편성이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어느 순간, 모든 사람이, 모든 존재가 가장 좋은 상태로 살아갈 수 있다면 정말 덕이 가득한 세상이 도래할 거란 믿음. 그렇지만 사람들에겐 너무 멀리 있는 덕보다 가까이 있는 현금이 더 믿음직스러운 것을 부정할 순 없다.


사실 인간의 도덕에 기대어, 인간의 양심에 기대어 자기의 좋은 것을 내어주고 타인과 공유할 수 있다면 국가가 나설 필요도 사회적 의무감을 강조할 이유도 없다. 유호덕이 가능하려면 내가 덕을 베풀면 그 덕이 나에게로 온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고, 나아가 실제로 나에게 덕이 돌아온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확인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덕을 받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할 줄 안다는 말이 있다. 물론 사랑을 안 받아 봤다고 사랑을 할 줄 모른다는 건 편견이고, 그보다는 그런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용서를 받고 자비를 받는 사람은 그것이 갖는 깊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상 누구나 그런 것들을 '대가 없이' 받을 수 있다면 더 좋은 사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당신도 즐겁고 나도 즐거운 세상
베풀어서 함께 즐거울 수 있다면


이를 공리주의로 해석하면 복을 받는 사람은 즐겁고 그 사람이 즐거워하니 복을 주는 사람도 즐거울 수 있다. 또한 복을 주면 복을 받고 그 복이 사회 전체로 확대되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될 수 있다. 공리주의는 인간이 쾌락과 고통에 지배되는데, 다수의 쾌락과 행복이 증진되는 방향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호덕은 동양의 오래된 공리주의 이론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특히 공리주의 입장에서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을 정립했던 콩트는 모두가 ‘이타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타주의적 입장에 서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의미였다. 최근에는 이와 반대로 이기주의자가 되라는 견해가 있다. 이것 역시 공리주의적 입장에 서 있다. 자신을 행복을 위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에 비례해 행복한 사람이 늘어날 것이며 이를 다 합치면 결국 사회에 행복한 사람이 늘어난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되었든 서로가 서로를 좀 더 너그럽게 이해하고 서로의 희노애락을 함께 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 자체로 덕을 베푸는 일이고 그것이 개인과 사회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경쟁에 있고, 그 속에서 덕을 베푼다는 것이 너무 허무맹랑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방향이어야 더 많은 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공존과 공생을 위해 필요한 일이 아닐까.


그래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왜 배풀어야 하는지. 베풀 필요가 있는지. 또 무엇을 위해 베풀어야 하는지.


*블로그 바스락(홈피)

https://www.basol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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