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고 , 영화에세이3:)
이름: 이찬실 나이: 마흔, 미혼이다. 그녀는 영화제작PD이다. 그녀는 지감독이라 불리는 한 예술영화감독과만 일을 하며 자신의 커리어를 쌓는 외길인생을 걸었다. 쫑파티를 하던 어느 날 지감독은 술을 먹다가 급사 하게 된다. 그리고 찬실이의 일은 뚝 끊긴다. 돈도 없고 직업도 잃은 찬실이는 계단도 많고 경사도 가파른 달동네로 이사를 간다.
그녀는 먹고 살기 위해 친구인 배우 소피의 집에서 집안일을 하며 생활비를 번다. 그리고 소피의 프랑스어 과외선생이자 단편영화감독인 ‘영’을 만나며 짝사랑을 시작했으나 결국 차인다.
벌어진 일들만 나열하면 찬실이는 복이 지지리도 없는데, 영화의 제목은 찬실이는 복이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찬실이가 복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내 맘대로 정의 내려본다.
1.찬실이는 달동네로 이사 오면서 주인집할머니와 친구가 된다. 할머니에게 글을 알려주고 집안일을 도와준다. 집에 오면 할 일이 많다.힘든 시기에도 그녀는 외롭지가 않다.
2.찬실이는 그 집을 떠돌아 다니는 흰색 메리야스와 흰색 팬티를 입은 천사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장국영이라고 우기는 한 남자를 만나 친구가 된다. 장국영은 찬실이가 힘들 때마다 나타나서 대화를 하며 찬실이 자신에 대해 깊이 깊이 생각할 기회를 마련 해 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 자신의 영화 시나리오로.
3.일거리가 뚝 끊길 무렵 찬실이는 친구 소피의 도움으로 알바 자리를 바로 얻는다. 지금 같은 시국에 알바몬 접속 한번 안하고 면접도 프리패스로 바로 일자리를 얻어 생활비를 번다는 것은 행운이다.(개꿀이다.)
4.그리고 그곳에서 소피의 프랑스어 과외선생이자 단편영화감독인 ‘영’을 만나 사랑이라는 감정도 다시 일깨워 본다.
5.찬실이에게 힘을 주겠다고 찬실이의 집에 몰래 찾아온 직장 후배들과 영과 소피. 그 높은 언덕을 올라오며 그녀를 위로해 주겠다고 온 그들 덕분에 찬실이의 마음은 많이 따뜻해졌을 것이다.
6.딸이 제작했던 영화가 재미없었다곤 했지만, 편지를 보내며 위로를 해주는 부모님도 계시다.
찬실이 주변에는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녀가 우울한 와중에도 밝음을 유지하는 이유일 거다. 그녀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예의 바르지만 솔직하며 자신 스스로의 감정에도 솔직하다. 찬실이는 복이 넘쳐 흐른다.
이름: 고양이가나오는영화 나이: 반칠십. 미혼이다. 지금의 나는 연기선생님이자 배우이다. 나는 영화하겠다고 애써 영화과에 들어가서 영화 공부를 하다가 졸업 후에는 또 연기를 하겠다고 이 알바 저 알바를 하며 돈을 모으고, 연기를 배우고, 필름 메이커스 라는 배우구함 사이트에 거의 살다시피 하며 지원을 하고, 수많은 단편영화에 출연을 하고, 또 프로필 사진을 찍고, 제작사를 돌아다니며 배우 이력서인 프로필을 돌리고(프로필 투어라고 한다), 연기 연습을 하고 오디션을 보고, 상업영화와 드라마에 잠깐이지만 출연을 하고 또 프로필 사진을 찍고 프로필을 돌리고 연기연습을 하고 또 오디션을 보고, 또 촬영을 나가고, 운이 좋아 내가 출연한 영화가 영화제에 걸리기라도 하면 스크린에서 내 연기도 보고, 관객과의 대화도 해보고, 인터뷰도 해보고 찰나의 좋은 시간을 즐겼다 또 프로필을 돌리고 연기연습을 하고 또 오디션을 보고의 반복적인 생활들을 이어 나가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일을 이어나가기 위해 지금은 연기 선생님이라는 직업도 같이 택했다. 쓰면서도 숨이 찬다. 이건 마치 끝나지 않는 도돌이표 노래를 계속 부르는 느낌이다.
찬실이가 예술영화피디 외길인생을 걷듯. 나도 졸업 후 연기 하나만 보고 외길인생을 걷고 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나를 둘러싼 상황들이 포기하라고 여러 번 신호를 줬던 것 같은데 끝까지 버티며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연기를 배우는 초반에는 연기를 못하니까 캐스팅이 되어도 아쉬움 가득이었고, 중간쯤에는 집안의 어려움과 생활고 때문에 빚을 갚기 위해 다양한 행사 알바를 뛰며 돈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보자라는 생활을 하며 연기생활을 이어 나갔고, 그 후로는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집에서 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하는 등 많은 위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놓지 않았다. 내 의지가 아닌 상황에 지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시간들을 겪으며 엄마 아빠는 나를 포기했고, 찬실이 아빠처럼 하얀 거짓말은 못하고 현실적인 평가를 하기는 하지만 소소하고 잔잔한 응원을 보내주고 있다.
내 친구들도 일에 대해서 이젠 깊이 물어보지 않는다.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만 안부를 물어봐주고 애써 위로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맛있는 것을 함께 먹고 좋은 말을 해주려고 노력한다. 나는 그것만으로 참으로 고맙다. 곁에서 오래 나를 지켜본 사람만이 해 줄 수 있는 배려라고 느낀다.
그 중에서도 내 동생의 위로는 특별하다. 어느 날 집에서 짜증을 내며 툴툴거리는 연기를 하고 있었는데 동생은 방문을 열고 누구랑 싸우느냐 조심스럽게 물어봤었다. 그 때의 쾌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자식, 내 연기에 꿈뻑 속았군.’
나는 내 연기에 대한 나르시시즘에 빠진다. 평소엔 위험하지만 뭐 지금 만큼은 마음껏 누리지 뭐. 이 찰나를 그냥 보낼 순 없다. 마음껏 젖어들자.
그러고 보니 이런 순간이 또 있었다. 집 앞 자주 가던 연습실에서의 일이다.
오디션 대본 중에 차 속에 갇혀서 ‘살려 주세요’를 연달아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몇 번이고 ‘살려 주세요’ 를 외쳤다. 하면 할수록 감정도 커져서 더더욱 처절하게 외쳤다.
그렇게 열심히 외치고 있을 때 쯤. 한 여중생이 내 방문을 계속 크게 두드렸다. 그리고 다급하게 괜찮냐고 물어봤다. 나는 방문을 열었고 뻘쭘하게 미안하다고 연습중이라고 얘기했다. 머쓱해하며 돌아가던 그녀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 순간 또 한번 짜릿했기에...
코로나19로 먹고사니즘에 대한 위기의식이 다시 한 번 강렬하게 생각을 덮쳤다. 아, 고독했다. 그 때 찬실이가 친구 소피의 소개로 일자리를 얻듯 나도 동료선배의 도움으로 아역 연기 선생님이라는 길을 뜻하지 않게 걷게 되었다. 처음엔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잼민이들 때문에 화도 여러 번 났지만 지금은 아이들의 작은 성장 하나하나에 또 하나의 다른 짜릿함을 느끼고 있다. 나는 생활비도 벌고 동료에 대한 감사함도 느끼고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느끼고 있다.
우리집엔 장국영은 살지 않지만, 노란 치즈 코리안숏헤어 고양이 누미찡이 산다. 그는 약 7살 정도 된 중년의 고양이이다. 누미찡은 스트릿 출신으로, 길에서 나를 보자마자 특유의 넉살로 내 신발에 뒷발팡팡질 등의 장난을 치며 나를 유혹했고, 그 후 우리집에서 쭈욱 살고 있다. 지금은 언제 밖에 살았었냐는 듯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는 쫄보에 다양한 울음소리로 말을 거는 시끄러운 고양이다. 나는 인간과의 대화가 힘들 때면 누미찡과 대화한다. 누미찡은 짧고 길게 높고 낮게 다채로운 음성으로 나에게 대답해 준다. 대답해 주기 귀찮을 때면 눈으로 꿈뻑거리며 대답하거나 꼬리를 맘껏 휘두른다.
나는 누미찡 앞에서 자주 운다. 누미찡은 내 울음에 반응이 없다. 아니 무반응으로 반응을 해주고 있는 거 일 수도 있겠다 싶다. 아무튼 나는 그런 누미찡의 반응에 더 잘 울 수 있게 된다. 일이 마음대로 안 풀릴 때도 울고, 반복되는 생활이 지겨워서도 울고, 돈이 없어서도 울고, 다큐멘터리를 보다가도 울고, 드라마 보다가도 울고, 너무 자고 싶어서도 울고, 너무 피곤해서도 울고, 너무 많이 잤다고도 패배감 든다고도 운다. 참 쓰잘데기 없이 운다 싶지만, 울다가 누미찡을 쳐다볼 때면 누미찡의 무덤덤한 표정에 갑자기 객관적으로 내 모습이 보인다. 그 다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해진다. 아! 운동을 해야지, 아! 글을 써야지, 아! 연습을 해야지, 아! 밥을 먹어야지. 아! 그냥 존버야. 꾸준히 해. 찬실이에게 생각의 길을 제시해줬던 장국영, 그녀는 장국영 때문에 자신에 대해 깊이깊이 생각하고 사는 게 뭔지 궁금해도지고, 그 끝에 재미없는 시나리오 같긴 하지만 영화 시나리오도 써내려 간다. 찬실이는 아직 영화가 너무너무 좋다. 삶과 사람과 함께 영화를 하고 싶은 꿈이 있다.
나 또한 집에서 매일 자신의 루틴(그루밍하기, 응아하기, 지켜보기, 츄르 달라고 떼쓰기, 우다다하기 등등)으로 누가 뭐래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누미찡을 보면서 내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얜 뭔데 그렇게 지 하고 싶은 대로 살지? 싶으면서도 그걸 보며 나도 나 하고 싶은 대로 살자! 라고 다짐을 하는 것을 보니 누미찡은 나에게 있어 장국영 같은 존재가 맞는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연기를 하고 싶고, 여전히 영화가 좋고, 여전히 도전하고 싶다. 내 생활을 잘 살아가고 싶고 내 주변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 꿈 따로 생활 따로가 아닌 조화를 꿈꾼다.
찬실이는 지금도 어두운 밤, 밝고 동그랗게 뜬 달을 보며 노트북으로 시나리오를 써내려갈 것이다. 나도 어둑해진 밤, 연습실로 향할 것이고 달이 안 보이는 지하연습실이지만 열심히 연기를 연습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짜릿함을 맛 볼 것이다.
+덧붙임: 아, 근데 나에게 ‘영’과 같은 존재는 언제 나타나는 걸까. 존재하긴 하는 걸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아, 고독하구먼.
제목: 찬실이는 복도 많지
감독 : 김초희
출연: 강말금,윤여정,김영민,배유람,윤승아
개봉:2020.03.05/2020.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