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 최순덕 성령충만기

소설

by NUNCIUS

이기호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 (문학과지성사 2004)



예전에 단편 <수인(囚人)>을 인상 깊게 읽었던 이기호 작가의 단행본을 조금씩 사 모았고 이제 다 사서 출간 순서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책을 읽다가 기억해 두고 싶은 문장을 만나면, 표지에 쓰인 색과 가장 비슷한 색의 얇은 포스트잇을 붙인다. 이 책의 표지에는 귤색이 쓰였으니 사용할 포스트잇은 주홍색이다. 그런데 표시하고픈 문장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이미 밑줄이 쳐져 있었다. 주홍색 형광펜으로. 중고로 산 책이다. 그다음, 그다음에 표시하려고 하니 이미 표시가 되어 있었다. 주홍색 형광펜 혹은 주홍색 색연필로.


책에 직접 표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나보다 이전에 이 책을 읽은 사람이 내가 감응한 문장들에 밑줄을 쳐 놓은 게 놀라웠다. 게다가 고른 색깔도 일치하다니. 어떤 운명의 장난으로 극히 드문 취향의 독자가 중고로 판 책을 내가 샀다.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이 책을 중고로 팔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이기호 작가를 몇 권 읽어 보고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새 책을 샀을 텐데. 이 책을 중고로 살 적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


이기호 작가는 글을 어렵게 쓰지 않는다. 그리고 일단 재미있다. 약간 썰렁한 유머가 들어가기도 하는데 그마저 내 취향이다. 소설이 엉뚱하고 허무하게 전개될 때도 있다. 그 속에 소시민의 애환,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영혼들이 담겼다. 읽으면서 마구 웃지만 시사적(사회적)인 이슈를 다채롭게 다루고 있어 서글퍼진다. 그럼에도 작위적이거나 위선적인 느낌이 전혀 없다.


단편 하나하나를 인상 깊게 읽었다. 어떤 작품은 간단히 몇 줄의 감상만 적었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뿐, 안 읽으면 후회하지 않을 작품은 하나도 없다.





<버니>


등단작. 노래 가사 형식임을 알아차리고 크게 놀랐다. 본문은 랩이고 소챕터마다 같은 가사의 후렴구가 시처럼 적혀 있다.



<햄릿 포에버>


연극과 현실의 관계. 햄릿의 변주.

본드 흡입이라는 과학적인 설명은 있지만, 상상 속 세계가 더 현실 같은 면이 있다.



<옆에서 본 저 고백은 - 고백시대>


앵벌이들이 신용정보회사(‘돈 받아 드립니다’)에 입사하기 위해 자기 소개서를 쓰고, 자기 소개서를 써 본 듯한 피씨방 아르바이트 청년에게 도움을 받는 내용이다. 당장 먹고 사느라 자기성찰 따위는 해 본 적이 없는 나이 든 앵벌이들. 자기 소개서에 무엇을 얼마나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하는가의 문제. 남의 자소서를 첨삭하다가 자기 감정이 폭발한 아르바이트 청년.


문체는 유쾌하고 유머러스하지만 그리 가벼운 내용은 아니다.


이제 뻔한 불행은, 그게 아무리 사실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 불행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미처 자신들이 생각해내지 못한 불행, 좀더 불행한 불행에 약해지는 법이다. (90)


“이거 먹고 해라, 지금 먹으면 둘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거야.”

(...)

엄청나게 불은 라면은 양은 냄비의 밑바닥을 다 가리고도 남았다. 고아원에선 언제나 라면을 그렇게 먹었다. 원장 아버지와 나는 그 라면을, 힘없이 툭툭 부러지고 마는 라면 줄기를,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101~102)



<머리칼 傳言>


초자연적 현상이 나온다. 성욕의 상징인 머리카락의 신비로운 힘.



<백미러 사나이 - 사물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뒤통수에 눈이 달려 뒤가 보이는 사람의 이야기. 초자연적 설정이 대학생 시위와 맞물려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사건들이 벌어진다.



<간첩이 다녀가셨다>


인간의 위선과 야비함을 간첩 침투 시기의 철야 예비군 훈련을 배경으로 극대화했다.



<최순덕 성령충만기>


성경 형식으로 쓰인 소설이다. 발상은 기발하고 성경 문체를 흉내 낸 문장은 익살스럽다.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 학창 시절 내내 교과서 대신에 성경만 읽다가 “하나님이 저를 세상에 보낸 의미"를 찾고자 고군분투하는 최순덕의 일대기로 내용까지 형식과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바바리맨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전도하는 최순덕의 대단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순덕은 사년제 대학과 전문대학 모두 응시했으니 대학에 지원한 것은 그녀의 의미요 그녀를 떨어뜨린 것은 대학의 의지더라 (239)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


국가라는 가치 아래 희생되는 개인. 이를 자본 권력의 문제로 치환하면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와도 닮아 있다. 소의 아들인 우석과 엄마는 남다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으로 그들에겐 자연스러운 일이 보통 사람들에게 비난받는다. 비일비재한 일이다.



<작가의 말>


이기호 작가의 전작을 본격적으로 사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바로 같이 사는 사람의 취향에 딱 맞을 것 같아서였다. 둘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여겨서 골랐다.


작가의 말을 읽고 또 한 번 놀랐다. 같이 사는 사람이 평소에 하는 말과 사실상 똑같은 말이 써 있었기 때문이다.


“서른 세 살의 나는, 비루하고 염치없는 주인공들에게 더 마음이 쏠리고, 교양 없고 막돼먹은 친구들에게 더 많은 눈길이 간다. 복잡다단한 플롯보다 조금 더 단순한 쪽에, 사변보다는 사건에, 근대보다는 전근대에 내 소설적 애정이 맞닿아 있다.” (332)

작가의 이전글최정화 - 없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