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보게 됐다가, 지금에서야 보게 된 걸 후회하게 되는 영화
다들 그런 경험 있지 않나요? 그 영화 너무 좋다는데, 명작이라는데 제목만 봐서는 영 끌리지 않아 나중으로 미루게 되는... 시네마 천국이 딱 그런 영화였네요.
드디어 보게 됐다가, 지금에서야 보게 된 걸 후회하게 되는...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다시 보게 될 것 같은 영화, 제가 너무 아프거나 속상할 때 꼭 다시 봐야지 마음 먹은 영화를 어제 봤습니다.
저는 연휴 기간에는 영화를 3편 몰아봤습니다. '그래비티'와 '해리포터:불사조 기사단'을 찍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 영원한 명작이라 불리지만 드디어 보게 된 '시네마 천국', 매년 이맘때쯤 챙겨 보는 '로맨틱 홀리데이'까지. 무언가를 보고 운 건 아주 오랜만이어서 오늘 편지를 쓰며 이 마음을 꼭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잊고 싶었던 것들에 관한 이야기, [시네마 천국]이 오늘 글의 주인공입니다. (감히 제 인생 최고의 영화인 듯)
얼마 전 친구들과 코로나가 끝나면 어디를 제일 먼저 가보고 싶니? 하는 질문들을 서로에게 했었는데, 그때는 어영부영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삿포로 아니면 네팔 정도가 가보고 싶다고.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니 확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 지긋지긋한 병마가 지나가고 나면 시칠리아로 떠나고 말 거라고!
처음 시칠리아의 모습을 상상해 봤던 건 '시칠리아섬엔 잊으러 온 사람들뿐' (이병률, 끌림)이라는 글의 제목을 봤을 때였습니다. 항구가 많은 곳이니 베네치아와 크게 다르지 않겠지 생각했던 것도 잠시, 영화를 보는 순간 시칠리아의 모습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원색의 버스, 광장을 채우는 수많은 모습의 사람들, 해변에 버려져 다시는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닻들... 시칠리아엔 감히 잊어선 안 될 것들로만 가득한 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아마 제가 영화에서 본 건 무언갈 정리하러 시칠리아에 잠시 들렀던 사람들이 내려놓고 간 기억의 잔해 같은 것이었을 수도요.
시네마 천국은 유명한 이탈리아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시칠리아 시골 마을의 단 한 대 뿐인 영사기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이, 영사기가 뿜어내는 빛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영화에 심취해 있는 아이.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고통도, 지금 처한 가난도 영화 앞에서는 모두 극복이 가능했습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요.
마을에서 영사기를 돌릴 줄 아는 건 주인공과 그의 나이 많은 친구 '알프레도' 뿐이지만 사고로 인해 세상을 볼 수 없게 된 알프레도를 대신해 토토가 대신 영사기 일을 맡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고 청년이 된 아이에게 알프레도는 자꾸만 떠나라고 말하고, 더 큰 도시에서 더 멋지게 성공해야한다며 그를 재촉하기 시작합니다. 분명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거라고요. 영사실에서 보던 영화와는 다르다고, 사실 삶은 훨씬 더 힘든 것이라고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겠죠.
"돌아와선 안 돼. 깡그리 잊어버려야해. 편지도 쓰지 마. 향수에 빠져선 안 돼. 잊어버려. 만일 못 참고 돌아오면 널 다신 만나지 않겠어. 알겠지?"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 무언가를 포기한 주인공은 영화 감독으로 보란듯이 성공합니다. 30년간 고향에도 가지 않고 독하게 성장해 온 그에게 사랑이 없는 결혼, 일과 일상의 괴리감 등으로 인해 슬럼프가 찾아오게 되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오는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회상과 함께 영화는 시작되고요.
앞으로 내 삶이 풀리지 않을 때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줄 과거의 기억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실체도 모르는 구원이 있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에요. [시네마 천국]에서 보여준 것처럼, 잠시 내려놓고 그 때로 돌아가면 많은 것들을 해결하고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현재까지 내가 일구어낸 모든 것들이 어디서 출발했는가 생각하면서 감사한 마음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날 사랑해주었던 그 사람, 그 장면, 그 말. 잘 떠올려지지 않는 장면들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내가 간직했던 유산이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성공을 거머쥔 후 방황하는 시기가 제게 온다면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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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참 좋았던 이유 : 음악과 광장]
귀에 참 익숙한 이 음악이 [시네마 천국]의 ost 였다니!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똑같은 음악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자꾸만 들었습니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음악이 자꾸만 떠올랐지만 사실 큰 연관은 없었다고... 지금 편지를 쓰는 와중에도 무한 반복 중!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을 광장이 자주 배경이 됩니다. 유럽의 광장에서 저는 이상하게 포용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물리적으로는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여있어 보호받는 듯한 안정감을 주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과 음식점(이 내뿜는 굴뚝 연기도 좋고) 그리고 카페들이 사방에 있어서요. 또, 사람들을 태우고 이동하는 버스가 멈추는 곳이면서 기쁘고 슬픈 일이 있을 때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곳이 광장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자신의 소유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밉지 않고 주인이 없으니 누구도 박탈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곳이기도 하지요. 결국 광장에서는 혼자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빙빙 둘러 이야기 했네요.
영화가 드물던 시절, SNS보다 광장이 소중하던 시절이 배경인 이 영화에서 영사기를 통해 광장에 영화를 틀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람들에게 건물 높은 곳에서 영사기와 함께 있는 영화속 캐릭터는 아마 신적인 존재였을지도 모를 일이겠어요.
P.S: 필름이 소실되는 건 견딜 수가 없는 일이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필름에 타지 않는 물질들을 발랐답니다. 한사코 소실을 막아내고 말 거라는 마음이었겠습니다. 불에 타도 괜찮을 필름 같은 건 없다고. 우리에게 사라져도 괜찮을 기억 같은 건 없을 거라고요. 우리는 잊지 않기 위하여 무슨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