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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누 Jun 17. 2021

디지몬 - 그래, 그리 쉽지는 않겠지

똥몬의 딜레마

똥몬의 딜레마


처음 친구를 사귀면 우리는 서로에게 이것부터 물었다.


“넌 몇 살이야?”


이것은 유교 정신에 입각하여 서로 간의 서열을 정리하기 위한 질문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의 강함을 묻는 질문이었다. 우리는 보통 두 살이거나 세 살, 나이가 좀 많으면 네다섯 살 정도였다. 일곱 살이 넘는 친구는 거의 없었다. 보통 네 살을 기점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혹은 대변을 빨리 치워주지 않아서 죽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디지몬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싸울 때 멋있는 불꽃을 쏘는 그레이몬류 디지몬으로 진화시키고 싶었다. 적어도 똥을 던지는 속칭 ‘똥몬’이 되지만 않기를 바랐다. 그레이몬류 디지몬으로 진화시키기 위해서는 아주 올바른 육성을 해줘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 똥을 치우고 밥을 먹이고 훈련을 시켜야 했다. 밀리는 일 없이 성실하게. 하지만 학교에 디지몬을 가져오는 건 금지였기 때문에 우리는 늘 전전긍긍해야 했다. 빨리 집에 가서 똥도 치워줘야 하고 밥도 줘야 하고 훈련도 시켜야 하고 배틀도 해야 했다. 집에 방치하는 걸로는 제대로 된 육성을 할 수 없었다. 방치하는 육성의 결말은 언제나 똥몬이었다. 키우던 디지몬이 똥몬으로 진화하면 우리는 쓰라린 육성 실패를 통감하며 뾰족한 무언가로 리셋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육성 실패 개체를 똥몬이라 불렀다. 그게 똥몬의 정식 명칭이었다.


운이 좋으면 그래도 데이터 속성 디지몬으로 진화하기도 했다. 데이터 속성 디지몬은 말하자면 그레이몬보다는 멋없지만 그래도 똥몬보다는 나은 중간 정도의 디지몬이었다. 못내 아쉽지만 그래도 감지덕지였다. 데이터 디지몬이 되면 싸울 때 폭탄을 던지는 작은 디지몬으로 진화했다. 정말 도트 같이 생긴 디지몬이었다. 그레이몬은 미사일을 쏘는 근사한 디지몬으로 진화했다. 예를 들면 메탈 그레이몬. 도트로 된 생김새로 봐도 멋이 흘러넘쳤다. 똥몬은 싸울 때 하트를 발사하는 조금 미묘하게 생긴 디지몬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그 하트를 발사하는 디지몬이 세 디지몬 중에 가장 강력했다. 그러니까 똥몬에서 진화한 디지몬이 가장 강했다. ‘똥몬에서 진화한 애가 제일 강하대’ 우리는 그게 현실이 아니길 바랐다. 만화에서는 메탈 그레이몬이 에테몬을 이겼으니까. 하지만 미사일을 쏘는 멋진 디지몬과 폭탄을 던지는 작은 디지몬과 하트를 발사하는 이상한 디지몬중 가장 약한 건 미사일을 쏘는 멋진 디지몬이었다. 폭탄을 던지는 디지몬은 그냥 항상 중간이었다.


결국 우리는 똥몬의 딜레마 앞에 놓이게 되었다. 똥몬은 성숙기지만 성장기보다 약했고 무엇보다 싸울 때 똥을 던졌다. 솔직히 생긴 것도 너무 못생겼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그레이몬은 멋있고 워매몬은 못 생겼으니까. 하지만 강함을 위해서는 멋을 포기해야 했다. 가장 멋있는 디지몬은 가장 약한 디지몬으로 진화하고 가장 못생긴 디지몬은 가장 강한 디지몬으로 진화했으니까. 선택받은 아이들의 파트너는 다들 근사한 디지몬이었고 그걸 보며 디지몬을 키우는 우리한테 똥몬에게 애정을 붙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똥몬이 되었다고 리셋 버튼을 누르는 건 너무 잔인하고 폭력적인 행동이었다. 반려동물이 귀엽지 않아 졌다고 버리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비록 도트로 된 데이터라 해도 말이다. 어떤 친구가 그레이몬을 거쳐 메탈 그레이몬이 되면 다들 부러워했다. 똥몬을 거쳐 하트를 발사하는 디지몬으로 진화하면 배틀을 꺼려했다. 가장 강한 디지몬이니까 이길 수가 없었고 게다가 이상한 디지몬에게 졌다는 사실이 묘하게 자존심 상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월한 개체를 원했다. 그건 누군가에게 배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릴 때 이미 차별과 혐오를 하고 있었다. 대상이 도트 그래픽일 뿐이었다.


우리는 똥몬을 싫어해야 할 이유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다. 똥몬은 약해, 똥몬은 못생겼어, 똥몬은 똥을 던져, 진화해도 못생겼어, 하트 던지는 거 멋없어, 주인공은 이런 디지몬 안 써, 그냥 똥몬은 싫어. 육성 실패 개체라는 명칭도 우리가 똥몬을 싫어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똥몬을 미워하고 내 디지몬이 똥몬이 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느라 어린 나는 무언가를 잊고 있었다. 태일이는 아구몬이 그레이몬으로 진화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태일이는 아구몬이 워매몬으로 진화해도 함께 싸웠을 것이다. 비록 파트너가 똥을 던지지만. 그래도, 그래도 사랑했을 것이다.


우리는 디지몬을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냥 잘난 무언가를 가지고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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