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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누 Jun 08. 2021

디지몬 -
그래, 그리 쉽지는 않겠지

그래, 그리 쉽지는 않았다. 나를 허락해준 세상이란.

그래, 그리 쉽지는 않았다. 나를 허락해준 세상이란. 


디지몬 어드벤처 시리즈의 마지막 극장판인 <디지몬 어드벤처 라스트 에볼루션: 키즈나>가 개봉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20년 4월부터 디지몬 어드벤처가 리부트 되어 방영하고 있다. 선택받은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쓰고 태블릿 피시를 통해 디지몬 세계로 들어가는 모습이 뭔지 모르게 낯설었다.


사람에게는 그것을 빼놓고는 그 사람을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하나씩은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에게는 디지몬이 그렇다. 물론 디지몬이 나를 다 설명해주진 못하지만 디지몬이 없이는 나를 설명할 수 없다. 


디지몬 어드벤처가 1999년에 처음 방영됐고 우리나라에 방영된 건 그다음 해인 2000년이니까 벌써 20년을 훌쩍 넘겼다. 가상의 친구들이 사실 일본인이라는 것도 모르고 번역된 이름을 부르며 그들의 싸움을 응원하던 나는 어느새 삼십 대에 접어들었다. 리키와 나리가 나랑 동갑이니까 그들 또한 벌써 이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것이다.


리부트 된 디지몬을 어른이 되어 다시 보니 선택받은 아이들이 어려도 너무 어렸다. 설정을 찾아보니 태일이와 매튜가 2009년생이었다. 저 어린이들에게 세계의 존망을 맡겨야 한다는 게 어른으로서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세계를 구해내는 선택받은 아이가 아니었고 디지털 월드로 떠나는 아이들을 바라봐야 하는 그저 그런 어른이었다. 나는 내가 태일이인 줄 알았는데 자라고 보니 나는 마일도였던 것이었다. 파워 디지몬 마지막화에서는 모든 사람이 파트너 디지몬이 생겼다고 하지만 나에게도 파트너 디지몬이 생기는 일 같은 건 없었다.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고 디지몬은 가상의 스토리에 불과했으니까. 


현실에는 세계를 해치려는 사악한 디지털 생명체도 그에 맞서는 멋있고 착한 디지털 생명체도 없었다. 시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구민이는 내가 설정해놓은 플레이리스트도 틀 줄 몰랐다. 세계는 언제나 위기이지만 그걸 구할 수 있는 선택받은 아이 같은 건 현실에 없었다. 


2015년에 처음 개봉한 디지몬 어드벤처 트라이와 2020년에 개봉한 라스트 에볼루션 키즈나에는 각각 청소년 시절의 선택받은 아이들과 청년 시절의 선택받은 아이들이 나온다. 고등학생이 된 태일이가 진로 고민을 하고 성인이 된 태일이가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세계를 구할 선택받은 아이였지만 결국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자라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해야 했다. 신태일이든 마일도든 상관없이 모두 자라야만 했다. 


그래 정말 그리 쉽지는 않았다. 나를 허락해준 세상이란. 


한층 더 어른에 가까워진 선택받은 아이들은 그래서인지 자주 망설였다. 세계를 구해야 하는 자신들의 운명과 세상을 살아가는 각자 개인의 삶 사이에서 그랬다. 그들은 망설인 끝에 중대한 결심을 하고 싸웠다. 어른이 된 선택받은 아이들은 세계를 구하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세계도 구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어서 나는 더 이상 디지몬을 웃으면서 볼 수 없었다. 


어릴 때는 학교에 가지 않고 디지털 월드로 간 태일이가 부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태일이가 부럽지 않다. 나는 선택받지 않아서 세계를 구해야 하는 사명 같은 건 없었으니까. 나는 그냥 나에 대한 사명감만 있으면 충분했다. 


리부트 된 디지몬 어드벤처에서 다시 어려진 타이치와 야마토는(타이치와 야마토는 태일이와 매튜의 원작 이름이다) 아구몬, 파피몬과 함께 이름 모를 악한 디지몬과 싸움을 벌였다. 코시로는 최신 노트북으로 싸움을 지켜보며 실시간으로 새로운 정보를 전달해주었다. 도쿄 지하철이 해킹을 당해 지하철끼리 충돌하기 직전이고 미군 기지에 있는 미사일이 도쿄를 향해 발사하고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타이치와 야마토는 ‘우리가 해야만 해 우리만이 할 수 있어!’라고 말하며 망설이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싸웠다. 나는 아이들이 벌써부터 저런 사명감을 갖는다는 게 문득 슬퍼졌다. 


그것이 그저 티브이 애니메이션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면서 나는 아이들이 자신들이 선택받은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조금만 더 늦게 깨닫기를 바랐다. 그냥 이 싸움을 게임처럼 생각하기를. 선택받지 않아서 세계를 구하지 않아도 되는 나는 바랐다. 


김누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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